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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r 13. 2019

대법관 지명과 사생활 보장

웨스트윙 시즌1 9화

(8화는 별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패스!)


미국 정치에 있어 대법원이 어떻게 구성돼있는가는 지금 대통령이 누구냐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중요할지도 모른다. 한국이 수도이전, 정당해산, 탄핵심리 등 온갖 엄청나게 중요한 정치적 이슈들의 최종심급을 헌법재판소에 맡겨버리듯이, 미국도 대법원에 그러한 것들을 맡긴다. 예컨대 오바마 정부 시절 동성혼 합법화 결정은 오바마가 아니라 대법원이 내린 거다. 물론 한국의 헌재나 미국의 대법원은 그러한 자신들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어 결국 당대 사회의 여론을 어느 정도 반영해서 판결을 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대법원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는 당대의 중요한 이슈들(특히 진보적 이슈들)을 진전시키는 데 매우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정치의 사법화'에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현실은 그렇다는 얘기이고, 무엇보다 나의 반대와 별개로 이 이슈는 아주 재밌다. 길티 플레져랄까.


아무튼, 그러한고로 미국의 대법원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화두다. 그런데 이 대법원이라는 조직이 매우 흥미롭다. (남의 나라 얘기라서 흥미롭다.) 우선 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고, 그 중 한 사람이 대법원장을 맡는다. 대법관을 칭하는 영어단어가 몹시 독특하다. JUSTICE. 예를 들어 강남규 대법관을 부를 때 미국인들은 "JUSTICE 강남규"라고 부른다. 크으, 정의의 강남규. 이 다음이 중요하다. 대법관은 모두 대통령이 지명한다. WHAT? 그럼 한 대통령이 모조리 자기 성향으로 대법관을 꾸려버리면 어캄? 그래서 이 다음이 '가장' 중요하다. 대법관은 스스로 관두거나 은퇴하거나 죽거나 탄핵당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임기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어떤 대통령이 자기 임기 내에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다. (두 명을 임명하게 된다면? 정치인으로서는 로또 맞은 거다.) 이를 뒤집으면, 누가 대법관으로 지명되는가는 엄청엄청나게 논쟁적인 사안이라는 얘기다. 참고로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지만 상원이 동의해야 임명된다.


9화는 바로 이 대법관 임명과 관련한 에피소드다. 시작부터 조쉬와 CJ가 들뜬 풍경으로 시작하는데, '당연히 상원에서 동의될' 법관인 해리슨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거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대통령이 임기 내에 대법관을 한 명이라도 임명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신나는 일이다. 현직 대법관 한 사람이 "민주당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은퇴를 미루고 미루다가"(실제로 대법관들은 이런 결정을 위해 건강 관리에 엄청나게 열심히라고. 자기가 죽을 시점도 아주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얼마간의 소동 후 드디어 지명을 앞둔 시점, 샘 앞으로 투서가 올라온다. 해리슨이 스물여섯 살 대학에 다닐 때 익명으로 제출한 레포트다. 무슨 내용이냐면, 국가가 필요로 할 때 국민들의 사생활은 다소간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백악관은 발칵 뒤집힌다. 그리고 이 레포트, 그것도 대학 다닐 때 썼던 익명의 레포트 하나로 해리슨은 낙마한다. '사생활 보장'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이어서 바틀렛이 선택한 대법관 후보는 멘도자라는 이름의 법관이다. 기억하자. 웨스트윙은 아론 소킨이 '진정한 리버럴을 보여주마' 하기 위해 만든 드라마라는 것을. 멘도자는 라틴계다. 소장파이고, 동성혼 합법화에 찬성하는 진보적인 인물이다. 크으, 리버럴, 크으. 이 과정도 엄청 감동적인데, 드라마로 보시라.)



미국의 대법관이라 하니 떠오르는 글이 하나 있다. 정말정말 재밌게 쓰인 글이니 한번 읽어보시라. 오바마 정부 말기, 대법관 한 사람이 급사하면서 "임기 말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해도 되는가"라는 정치적 논쟁이 붙었다. 오바마는 헌법이 자기에게 부여한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단언했지만, 상원 다수당을 차지한 공화당은 버티기로 일관했고, 그 결과 오바마의 지명은 실패했다. 결국 트럼프가 임기를 시작하고나서야 그의 취향대로 임명된 게 '성폭행 미수'의 경력을 가진 브랫 캐버노다. 아아. 앗,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다큐멘터리인데, 제목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오는 3월 28일 개봉한다. 미국의 역대급 진보적인 여성 대법관 RBG,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회고를 담았다고 한다. 이 멋진 사람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와 있는데, 아주 충실한 서평기사가 하나 있어 공유.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하다 알게 된 건데, 내일 모레가 긴즈버그 옹의 86번째 생일이라고 한다. 우리 할머니보다 두 살 어리네. 생일 축하합니다. 오래오래 살아서 미국을 더 진보적으로 만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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