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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pr 29. 2019

이 사려깊은 마무리를 보라! (스포 有)

스포일러 가득한 <어벤져스 : 엔드게임> 리뷰.

<어벤져스 : 엔드게임>, 메가박스 벨라시타에서 봤다. 지금 시점에 리뷰를 남기는 것이 맞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치만 폐를 끼칠까 걱정돼서 지금 리뷰를 적지 않기엔 내가 이 시리즈를 너무 좋아했는걸. 가슴이 벅차 오를 때 남겨야 진심 넘치는 리뷰가 작성되는 법이다. 그런고로,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스포방지





1. "I'm Ironman", 처음 <아이언맨 1>에서 이 대사가 나왔을 때 토니 스타크는 스스로의 영웅됨을 받아들였다고 보기 어려웠다. 군수산업 자본가로서의 일말의 책임감이랄까. 유명세에 대한 열망도 있었을까? 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2편에서 그 유명세 속에서 망가져가는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면 양가적인 감정이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미완성이었던 대사가 <엔드게임>의 클라이막스에서 완성된다.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으로서의 대사. 결국 어벤져스 시리즈는 토니 스타크의 성장 서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1-1.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사도 함께 이야기돼야 한다. 이것이 당신이 본 상황이냐고 묻는 토니 스타크에게 닥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면 그 상황은 오지 않아." 토니 스타크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자기의지로 영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누군가 강요한 영웅됨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영웅됨. 이건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의 고유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 내내 토니 스타크가 피터 파커를 아낀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2. "하일 하이드라."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가 여전히 코믹스와 조응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예의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이 대사는 보여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대사는 2년 전쯤 원작 코믹스 세계관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진심으로 한 대사다. 영화는 이 대사를 유쾌하게 활용했는데, 코믹스의 맥락을 아는 사람으로서 정말 두 배로 유쾌했다. 이 대사는 단지 유머포인트나 기발함으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코믹스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정말 좋았다. 노인이 된 스티브 로저스도 그렇다. 원작 코믹스에서도 혈청이 풀려 노인이 된 스티브 로저스가 나온다.



3. 시간여행으로 2012년 장면이 처음 등장할 때 약간 울 뻔했다. 한 시리즈에 대한 회고를 영화 안에서 녹여내는 영리하고 메타적인 방식.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 시리즈의 (현재 시간대에서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인물들을 모두 출연시킨 것 또한 스스로에 대한 리스펙트가 느껴져서 너무 좋았다.


4. 이 영화에서 마블은 앞으로의 마블 영화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건틀릿을 전달하는 장면. 첫 시작은 호크아이가 끊었으나 블랙팬서가 이어받고, 다시 스파이더맨이 이어받고, 마지막으로 캡틴마블이 이어받는 장면은 이제 세대가 교체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피터파커를 지원하러 모든 여성 히어로들이 집결하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장면은 꽤 노골적인 의도를 깔고 있는데도 나무위키 류에서 아주 소극적으로("코믹스에 나온 장면을 오마주한 것") 언급하고 있는 것이 웃겼다. 정말 의도를 모르겠어?:) 어벤져스에 PC가 묻었다구, 이 친구들아! 


사실 원작 코믹스에도 여성 영웅이 엄청나게 많지만, 그 한계는 이 그림에서 보이는 그대로다. 무엇이 보이는진 각자의 몫.


4-1. 이외에도 몇 가지 '계승'이 묘사된다. 토르가 발키리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작년에 DC가 히트를 친 <아쿠아맨>을 떠올리면 이 계승은 보다 의미심장하다. <아쿠아맨>을 본 사람들은 아마 좀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뉴 아스가르드'의 풍경은 아쿠아맨이 살았던 마을과 꽤 닮아있고, 장발과 수염으로 덮인 토르의 모습도 아서 커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아쿠아맨>에서는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여성인 메라가 있음에도 그는 아서 커리를 찾는 역할만 수행할 뿐이고, 아서 커리가 남성이고 왕족의 피를 받았다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는 구시대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마블은 그 클리셰를 과감하게 뒤집는다. 발키리는 왕족도 아니고, 여성이지만, 왕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다! 


흑흑 메라누나 그딴 물고기놈 뒤치닥꺼리 하지 말구 누나 하고 싶은 거 다 해ㅠㅠㅠ


4-2. 그리고 스티브가 샘에게 방패를 물려줬다. 백인이 흑인에게 '아메리카'를 물려줬다는 것은 다들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샘은 여기에 한 가지 속성을 더 갖고 있다. 상이군인이라는 것. 강력한 능력을 갖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스티브 로저스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상해를 입고 제대한 군인인 샘 윌슨 역시 '캡틴 아메리카'라는 것. 


원작 설정을 반영한 거다.


5. 여러 영웅들 중에 아이언맨이 죽을 거라는 건 예상했고, 죽는 이유도 예상은 했다. 캡틴아메리카가 은퇴하리라는 것도 예상은 했지만, 은퇴하는 방식은 예상치 못했고,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사실 이 묘사 하나 때문에라도 엔드게임이 사랑스럽다. <로건>을 봤을 때 벅차오르던 그 감정과 같다. 블랙위도우가 죽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째서 블랙위도우를 죽이기로 결정했는지 궁금하다. 어떤 상징성을 갖는 걸까? 블랙위도우 사망 이후 현재로 돌아와 모든 영웅이 모였을 때 조연격인 로켓과 네뷸라 제외하곤 모두 남성이었는데, 이것이 구시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갓로건, 갓갓.


5-1. 캡틴아메리카의 은퇴 또한 <어벤져스>가 캡틴아메리카 서사의 완성임을 명확히 한다. 아이언맨이 "사익을 위한 영웅"이라는 의심을 받아온 것과 반대로, 캡틴아메리카는 "오직 공익만을 위한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양 영웅의 서사는 엔드게임에서 서로 교차하게 되는데, 아이언맨은 공익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죽고,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삶을 위해 영웅의 자격을 내려놓으며 은퇴한다. 한 시리즈의 완벽한 마무리.


6. 몇몇 남성 히어로들이 지난 외계인들의 침공에서 왜 돕지 않았냐고 캡틴마블에게 따지자 캡틴마블은 우주엔 니들같은 행성이 훨씬 많고 그곳을 지킬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두어 번 정도 나온다. 유쾌한 대사. 으어디 여자가 큰 일 하는데 남자들이 작은 일 갖고 징징대!


7. 사실 어벤져스 시리즈는 개별 영화로만 보면 10점 만점에 7점 정도가 적당할 영화들이었다. 영웅들이 합을 맞춰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억지스러운 연출을 한다든지, 빌런들의 파워 밸런스를 심각하게 붕괴시킨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런 어설픔은 <엔드게임>에서도 곧잘 드러난다. 다른 것보다, 솔직히 영화 초반에 토니 스타크가 너무 쉽게 지구로 귀환해버려서 좀 벙쪘다. (너무 쉽게 타노스의 목을 친 건 좋았다. 관객들이 갖고 들어온 기대를 순식간에 박살내고 완전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무장시키는 스토리.) 애초에 어벤져스 1편은 팬서비스의 개념이 강했다.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다 같이 싸우는 걸 보고 싶어하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 그러나 어벤져스 1편의 성공 이후 오히려 어벤져스 서사가 후속 솔로무비들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경향이 생겼고, 대표적으로 시빌워나 앤트맨과 와스프, 캡틴마블이 그렇다.  


아마도 거의 모두가 답답함을 느꼈을 그 장면. <인피니티 워>에서.


7-1. 하지만 엔드게임의 시간여행 설정은 지난 11년을 톺아보는 연출을 가함으로써 오히려 그 11년이 쌓아온 것보다 더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것은 엄청난 기획이었고, 마블과 케빈 페이지는 그 기획을 완벽하게 해냈다. 설렜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이런 기획이 중단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조금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개별 솔로무비들이 독립적이고 완결적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로건>이 좋았던 것은 엑스맨 시리즈의 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오직 울버린만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꾸며냈기 때문이었다. 3년 간격의 이 빅이벤트 때문에 솔로무비들이 자꾸 떡밥을 던지느라 미완결적으로 그려지는 것과, 상영관이 독점되는 것과, 디즈니 자본에 대한 비판이 점점 불가해지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어벤져스> 같은 기획이 가져오는 악영향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어벤져스라고 해도 말이다.


8. 한국인들 어벤져스 시리즈에 그렇게 열광하면서 정작 리스펙트는 별로 없는 것 좀 의아하다. 쿠키영상 없다고 영화 끝나자마자 다들 우르르 나가는 것 보면서 정말 낭만없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 캐릭터 하나하나에 힘 빡 준 엔딩 크레딧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어쩐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끝까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9. 번역에 대해서 말이 별로 안 나온다. 지난 번 오역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절치부심을 한 건지. 내 눈에(귀에?) 들어온 건 요즘 번역계에서 보이는 일종의 보신주의 같은 것이었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치는 대사 중에 -girl, -lady 같이 상대가 여성임을 이용한 여성혐오성 대사들이 있는데, 요즘의 번역가들은 이런 포인트를 그냥 무시하고 -person의 의미로 번역하곤 한다. 여성혐오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대사라면 그걸 드러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요즘의 어떤 관객들은 그 대사를 제대로 번역할 경우 그 책임소지를 번역가에게 묻는 경우도 있다곤 하지만 말이다.


9-1. "Avengers, Assemble." 이 말은 물론 어벤져스 시리즈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말이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엔드게임에 다다라서야 등장한 말이기도 하다. 마침내 이 말이 나온 장면은 정말 상징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 Assemble!이 아니라 Assemble...에 가까운 읊조림이라 더욱 좋았다. 다만 이 번역에 대해서는 고민이 조금 있다. "어벤져스, 어셈블"로 번역을 해둔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대사라고 해도 이렇게 음차를 해야만 할 필연의 이유가 있나?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히 마니아를 고려한 번역이 되는 셈인데, 정작 (아마도) 박지훈이 지금껏 해온 거의 모든 번역들은 마니아가 아닌 대중을 타깃으로 한 번역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마니아에 가까울 나는 저 말을 "어벤져스 집결하라" 또는 "어벤져스 집결" 정도로 번역했어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그래서 (아마도) 박지훈의 선택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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