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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8. 2019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2019년에

영화 <라이온 킹> 리뷰

<라이온 킹>, 메가박스 백석점. 별로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장점이 하나도 안 보이게 뽑혔을 줄은 예상 못했다. 사실상 1994년 애니메이션에서 거의 각색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포일러 주의도 붙이지 않겠다. 각색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겠다. 그래도 스포일러를 주의하고 싶다면 아래부터 스포일러이니 주의.


정말로 각색된 게 거의 없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이 작품을 골라 실사화해야 했는지 기획 취지를 묻고 싶을 정도로 무의미하다. 애초에 원작 애니메이션부터 구시대적이었다. 모티프가 당시 기준으로도 구시대적인 <햄릿>이었으니까. 1994년에도 구시대적이었던 걸 각색 없이 고스란히 옮겨오니, 2019년에는 거의 선사시대의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다.



확실친 않지만 대사 몇 마디가 추가된 것 같긴 하다. 예고편에도 나오는데, "누군가는 풍족한 삶을 누리고 누군 어둠 속에서 평생을 보내지"라는 스카의 대사와, "누군가는 빼앗을 것을 찾아 헤맬 때 진정한 왕은 무엇을 베풀지를 생각하지"라는 무파사의 대사 정도? 유튜브에서 같은 씬의 애니메이션 클립을 봤는데 거기엔 이런 대사들이 안 나오는 것 같다. 만약 추가된 것이 맞다면 참으로 정치적인 맥락의 각색이다. 애니메이션이 나온 1994년은 '리버럴의 위대한 승리'라 여겨지는 빌 클린턴 집권기였고, 지금은 '리버럴의 처참한 패배'라 여겨지는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기이니, 앞서 여러 디즈니 작품들의 메시지와도 상통하게 "가짜 왕"에 대한 무력감과 "진정한 왕"에의 열망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주제의식은 후반부 심바의 정권 수복(;;) 이후 다시 연주되는 Circle Of Life에서 다시 드러나는데, 의미심장하게도 "'Til we find our place(우리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 부분부터 가사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다만 이건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하여간 그놈의 place! 최근 디즈니의 경향이 부당하게 자리를 빼앗은 정통성 없는 자들에게 "Remember your place" 하고 윽박지르던 것이라면, <라이온 킹>은 부당하게 자리를 빼앗긴 정통성 넘치는 자에게 "Remember who you are"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아니 씨, 심바가 몰 그렇게 잘났는데요? 벌레 먹고 자란 애가 뭐 그렇게 힘이 쎄냐... 과학적 오류임...


아무튼 이런 점에서 <라이온 킹>이 지금 시점에 실사화됐어야 할 이유를 나는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이야기가 새로워진 것도 아니고, 다른 작품과 달리 동물이 주인공이니 결국 전부 CG로 그려질 수밖에 없어 사실상 '실사화'라고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인 작품을 말이다. 애니에서는 동물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었는데, 정작 실사화하니 그 부분도 사라져서 굉장히 밋밋해졌다. 주인공들과 목소리가 따로 노는 느낌.


그래도 그 와중에 원작을 재현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포기했더라. 예를 들어 Be Prepared. 제레미 아이언스만이 연기할 수 있는 그 교활함을 따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노래 길이를 과감하게 줄이고 곡 분위기도 단순히 위압적인 톤으로 바꾸었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때문에 스카의 매력이 반감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못하는 걸 무리해서 했다가 민망할 바엔 차라리 나은 결정이다.


다 큰 심바를 도널드 글로버가 연기했는데, Hakuna Matata가 정말 좋았다. 원작보다 훨씬 코믹하고, 짧지만 제4의 벽을 넘는 대사도 흥미로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성하기 전까지는 미스캐스팅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심바의 갈기 달린 근엄한 얼굴과 도널드 글로버의 목소리는 영 안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나는 무파사의 아들, 심바예요!!!" 각성하고 나서부터 연기톤이 확 바뀌고 그게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걸 보면서 역시 재능충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됨. 실사화 작품의 유일한 장점이라 하겠다.


덧. 그리고 역시 "생명의 순환"은 정말 기만 그 자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사자들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 풀로 자라면 초식동물들이 그걸 먹고 산다고 설명하는데, 야 이 나쁜 새끼야, 초식동물들은 죽으면 어디 흙 말고 딴 데로 가냐? 누가 들으면 지들만 풀로 자라나는 줄...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나쁜 놈들아...


덧. 그나저나 be prepared 가사 다시 보니까 이 영화의 주제가 좀 명확해진다. "무파사는 항상 사냥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규제를 걸었지 / 내가 왕이 될 때면 강한 자들은 원하는 게 뭐든 자유롭게 취하게 될 것이다 / 하이에나의 배가 가득찼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야" 앗... 이것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 아닌가... 이로써 '착한 자본주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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