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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08. 2019

독일의 과거청산 의지? 글쎄?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의 회계원> 리뷰

<아우슈비츠의 회계원>, 넷플릭스. 러닝타임 80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정말 생각할 거리를 엄청나게 던져대는 다큐멘터리. 이 다큐멘터리는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기록인데, 이 다큐멘터리는 단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나치 전범에 대한 재판사를 요약하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과거청산 재판의 명암을 살피고, 현재의 재판을 둘러싼 환경을 폭로한다. 8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이야기를 때려박은 이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한 번만 보고 리뷰를 남기기엔 다소 버겁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여기서 다 쓰긴 어렵겠고, 보면서 중간중간 메모해둔 것들을 바탕으로 조금만 써보자.


아우슈비츠의 회계원. 아마 많이들 들어본 말일 게다. 2015년 즈음에 한창 보도가 된 사건이다. 독일 사정당국에서 94세의 노인 오스카어 그뢰닝을 기소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회계원이었다. 알려진 바로, 그는 그곳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며 유대인 수용자들의 물건을 착복하기도 했다. 알려진 바로, 그는 직접적으로 유대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기나긴 삶 속에서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이제 살 날보다 죽을 날이 훨씬 더 가까워진 그를 독일 검찰은 기소했다. 그의 기소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너무 늙었다고 살려주는 법이 없었죠."



이 사건을 한국 언론은 "역시 독일"이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그 보도를 국민들도 "역시 독일"이라는 취지로 수용했다. 역시 모범적인 과거 청산의 나라, 완전히 속죄한 아름다운 선진국, 독일. 그에 반해 친일파들을 살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요직에 오르게 방치한 나라, 완전히 그들에게 지배당해 온 후진국, 우리나라. 대충 그런 구도로 이 사건은 소비됐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런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과연 독일의 길은 한국의 길과 얼마나 달랐을까. 그뢰닝의 재판은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확고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매끄럽게 진행됐을까. 과연, 과연?


답부터 밝히자. 독일의 길은 (적어도 빌리 브란트의 1970년대 이전까지) 한국의 길과 유사했다. 나치에 복역한 법관들로 구성된 사법부는 다수의 전범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고, 그들은 곧 사회로 복귀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성립된 것은 가히 '근대 이성의 승리'라 평가할 만하지만, 그 결과는 '맹목적 합리성의 반격'이었다. 그뢰닝의 재판은 전혀 매끄럽지 않았다. 그의 재판장 바깥에서는 네오나치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구호를 외쳐대며 그의 무죄를 요구하고 있었다. 한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서서는 "나는 그뢰닝을 용서했다"고 증언하며 그를 포옹하기까지 해 다른 생존자들을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고, 한국의 입장에선 써먹기 좋은 일들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게 현실이었다.


다시 그뢰닝을 보자. 혹시 그뢰닝은 소위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전형이었을까. 글쎄, 다큐가 보여주는 면면들을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비범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2005년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세력들을 비판하기 위해 "내가 봤다"면서 BBC와 인터뷰를 가진 거다. 정작 그 인터뷰 때문에 사정당국의 추적을 받아 기소당했다지만, 하여간 비범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나는 도덕적으로 유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유죄인지는 판단해달라.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도덕적 유죄의 인정과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도덕적 확신 사이의 간극, 그뢰닝은 바로 이 지점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BBC와 인터뷰에 나섰을 테지. 한편 그가 법원에서 진술한 내용들은 또한 그뢰닝이 완전히 속죄하지 않았다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데,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내비치거나 자기들의 조치가 정당했다는 식의 증언들이 바로 그렇다. 그는 평범하게 악한 인간이 아니라, 복잡하게 악마적인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를 기소한 독일 검찰의 사정을 보자. 정말로 그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거 청산의 의지'를 갖고 그뢰닝을 기소했을까. 글쎄, 다큐멘터리에 검사의 인터뷰가 나오지는 않아 잘 모르겠지만, 기자나 교수들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지금 독일엔 여전히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넘쳐 흐르고, 네오나치는 세력을 이뤄 공공연한 집회를 펼치며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94세의 그뢰닝을 기소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그 극우들에게 바로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 당신들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미래에 반드시 받게 될 불이익이 바로 그뢰닝이 오늘 받게 된 불이익이다." 아름다운 과거청산을 위한 기소가 아니라, 현재의 위협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로서 기소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뢰닝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복잡하게 악마적인 그는 항소에 항소를 거듭했고, 항소가 끝나지 않은 2018년 3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정의가 구현된 걸까, 아닐까.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젠데, 아무튼 이 일이 이슈가 되어 독일 검찰은 좀 더 열정적으로 생존 전범들을 기소하고 있다고 한다. 그뢰닝 재판 이후 19명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중 8명을 실제 기소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이 92세라는 자막이 엔딩 크레딧 전에 깔린다. 이 자막을 보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우슈비츠 당시 가해자들은 나름대로 지위에 오른, 당시에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아주 어린 아이들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미처 정의가 구현되기도 전에 가해자들은 편히 눈을 감기 시작하고, 생존자들은 여전히 그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 비극적인 불균형.


여기까지만 해도 좋은 다큐멘터리이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권하게 만드는 건 뉘른베르크 재판과 그뢰닝 재판 사이에 위치한 '존 데먀뉴크' 재판을 조명한 부분이다. 그는 전후 미국으로 이주해 살아가다가 1980년대 후반 폴란드 강제수용소의 학살범으로 기소된다. 그의 본명은 '이반 데먀뉴크'인데, 그가 바로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이반 뇌제'(별명이다)라는 생존자의 증언이 있었다. 이 재판에서 그는 끊임없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형죄를 선고받는데, 놀랍게도 살아남는다. 어떻게? 냉전 말기 여러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집행이 보류되던 와중에 냉전이 끝나며 구소련의 기록이 발굴되고, 거기서 진짜 '이반 뇌제'의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이반 데먀뉴크는 그 이반 뇌제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무죄 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 상황은 사형제 폐지에 관한 오래된 주제 중 하나다. "만약 사형을 선고받아 죽은 사람이 추후에 무죄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반 뇌제가 아니었지만 폴란드 소비도르 강제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그의 시민권을 박탈한 뒤 추방시켰고, 2005년 독일에서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 검사는 독일의 소극적인 태도를 증언한다. 독일에서 재판받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재판이 이뤄졌고, 결과는 물론 유죄. 그의 유죄 판결은 여러모로 중요했다. 그 또한 그뢰닝처럼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였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한 인터뷰이의 말처럼 "사람을 죽이는 기능을 하는 것이 명백한 수용소에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을 했다면 살인에 가담한 것과 다름없다."


아이고, 짧게 쓴다고 해놓고 엄청 길어졌다. 어쩔 수가 없다.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은 과거청산과 법과 사형제와 윤리, 도덕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복잡한 질문을 던졌으니, 어떻게든 그 질문들을 주워담아 내 안의 고민들을 조야하게라도 풀어낼 수밖에 없다. 관련 텍스트를 아래에 첨부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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