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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Oct 28. 2016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메모

그냥 나 스스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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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관계의 역전. JTBC 보도 이후 모든 게 바뀌어버렸다. 오늘 무슨 얘기를 하다가 '측근 비리'라는 단어를 발음했는데, 우습게 들렸다. 측근 비리라 하면 대통령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측근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터다. 지금은? 이미 중심적으로 언급된 수많은 이슈들(개성공단, 통일대박, 북한붕괴론, 이화여대...)은 물론이고 평창 올림픽이나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 같은 예상치 못한 이슈들에도 '최순실 게이트'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측근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개입됐다고 보는 게 오히려 더욱 적확한 상황 아닌가.


지금 기자들이나 비평가들이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시간을 되짚어 돌아가는 일인 것 같다. '최순실'을 키워드로 두고, 이 정부가 지난 4년간 해온 모든 것들을 다시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무엇이 정부가 단독적으로 한 것인지, 그런 게 있긴 한 것인지조차 의심해야 할 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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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또는 구조. 이런 말들에 자꾸 회의감이 든다. 정말로? 시스템이 잘 짜여 있으면 파국은 일어나지 않는 걸까? 이 사회의 여러 모순들이 정말 구조적 문제인가? 뭐 이런 생각들. 그러니까, '최순실 게이트', 조금 각을 좁히면 '문건 유출'은 시스템의 실팬가? 국감에서 비서실장이 최순실 연설문 의혹에 대해 "(청와대) 시스템적으로 성립 자체가 안 되는 이야기"라고 얘기한 적 있다. 내부 문서가 외부로 유출되는 걸 원천적으로 막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출됐다. 구조적 문제는 어떤가. 최순실 게이트는 구조적 문제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어떤 구조적인 인과가 있는가?


그래서 나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정치학을 전공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에서 실패한 시스템이 있다면 그건 오직 하나, 대통령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한 헌법일 거다. 수십년간 정제돼온 시스템이,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작동을 멈춰버렸다.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청와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시스템을 존중하는 합리적 인간이 대통령이 돼야만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합리적 인간'만이 작동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이미 시스템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시스템도 '선한 인간'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니, 고민은 좀 더 깊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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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하야, 거국내각. 오늘 몰랐던 헌법 조항 하나를 알게 됐는데, 깜짝 놀랐다. 이거다.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헌법 68조 2항).”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지, 구체적인 내용은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이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면 60일 내로 새로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 다시 5년의 임기를 수행한다. 반기문이나 지자체장들이 출마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제대로 준비도 안 된 후보들이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채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비극을 초래할 게 뻔하다. 하야가 아닌 탄핵의 방법을 취한다면 헌재 판결이 나오기까지 후보들이 물밑에서 준비할 시간이 조금 더 있겠지만, 그것도 충분한 시간은 아닐 게다.


이런 점 등을 고려해서 정치권이나 보수언론, 사회원로들은 '거국 내각론'을 언급한다. 대통령은 사퇴하지 않되 아무런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여야가 공동 참여하는 내각을 구성해 남은 임기를 수행하자는 주장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머리로는 이 판단이 가장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타임라인에 공유한 이관후 연구원이 말한 바로 그 이유에서다. 또 시민으로서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좀 복잡한 마음이다.


그치만 생각해보면 둘이 꼭 떨어져 있는 주장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가 타협의 기술이라면, 탄핵과 하야를 외쳐야 거국내각을 얻어낼 수 있다. 아무리 정치적 빈사상태의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해도 박근혜는 박근혜고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이다. 대선을 1년 앞둔 상황에 쉽게 주도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을 것임은 지난 4년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궁지로 몰아가야, 원하는 걸 내놓는다. 물론 그 궁지로 몰아가는 건 정치권의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탄핵과 하야를 말하면 역풍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계산하는 것이 저들이다. 결국 시민인 우리는 탄핵과 하야를 말하고, 정치권은 거국내각을 요구하고 얻어내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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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 멍때리고 있는데 엄마가 티비를 틀라는 거다. 이 시간에, 왜? 뉴스를 봐야 한단다. JTBC 채널 번호도 외우고 계신다. 우리 엄만 평소 뉴스를 즐겨 보는 사람이 아니다. 이 광경이 너무 낯설다. '본방사수'라는 말이 탄생한 이후로 온 국민이 뉴스를 본방사수한 적이 있나. 내 기억엔, 없다. 성완종 파문 때 경향신문 1면을 궁금해 했던 적은 있는 것 같다. 그마저도 신문이지, 티비뉴스는 아니었다. '오후 8시(예전엔 9시였지-)에 뉴스를 본다는 것'의 느낌을 아주 오랜만에 상기해냈다. '디지털 퍼스트'가 지상전략으로 대두되는 2016년에 이런 느낌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제법 괜찮다.


땅바닥까지 떨어진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이번 일로 조금은 회복됐을지, 궁금하다. 배구로 따지면 조선일보가 리시브를 하고, 한겨레가 토스를 쳐서, JTBC가 스파이크를 때렸고 세트스코어를 따냈다. 어떤 영웅적인 언론이 해낸 게 아니라, 여러 언론이 각자 퍼즐을 모아서 함께 하나의 조각을 만들었다. 모두가 뉴스에 주목하는데도 신뢰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꽤 비극적인 일일 거다. 이런 모습들로도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면 당최 무슨 수로 회복할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좋은 민주주의에 좋은 언론이 필요하고, 좋은 언론이 되려면 좋은 독자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한테 이 문제는 꽤 중요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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