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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Feb 06. 2017

웨스트윙, 위대한 정치 교과서.

웨스트윙을 마지막 한 화만 남겨놓고 있다. 12월 마지막 주부터 달렸으니 일곱 시즌을 꼬박 한 달 조금 더 걸려서 본 셈이다. 왜 이제야 이걸 봤나 싶을 정도로 위대한 드라마다. 제작진이 이 드라마로 뭘 하고 싶었던 건지, 시즌을 거듭할수록 점점 명확해졌다. 말하자면 '미국인이 알아야 할 미국 정치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시대의 정치 교과서로 손색이 없다. 


일상적이지 않은 정치적/법적 장치들(예컨대 필리버스터, 대통령직 승계, 부통령 지명)을 정말 탄핵소추 빼곤 다 보여줬고, 당대의, 그리고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들(동성애, 낙태, 젠더, 사형제도, 마약과 같은 이슈들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나 중국-대만 갈등 같은 국제적 이슈까지)을 균형감 있게 설명해줬다. 덕분에 나도 이슈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내 관점을 정리했고, 어떤 이슈들은 따로 논문을 찾아 보충학습하기도 했다. 


7년 가까이 방영한 드라마이다보니 배우들이 영화 촬영으로 하차하거나 죽는 일도 일어난다. 리오 맥개리를 연기한 존 스펜서는 시즌7 촬영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즌5쯤에서 작중 리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간신히 살아나는 장면이 있는데, 현실의 배우가 바로 그 심장마비로 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현실이 작품에 반영된 건지, 작품이 현실에 반영된 건진 잘 모르겠다. 존이 알콜중독이었고 그래서 리오도 알콜중독자로 설정을 잡았다는 얘기는 본 것 같다. 


배우가 죽었으니 캐릭터도 죽는다. 시즌7 중간 리오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것 역시 원래 있던 설정인 건지 급조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개연성 있고 드라마틱한 전개였다. 리오가 죽은 뒤 두 화 뒤 에피소드 제목이 '레퀴엠'이다. 리오의 장례식 미사를 주제로 한 에피소드. 미사 장면과, 미사 이후 그를 기억하는 동료들의 대화 장면이 주된 플롯이다. 보는 내내 이상한 기분이었다. 리오의 장례식이자, 존의 장례식처럼 느껴졌다. 리오와의 기억을 얘기하는 캐릭터들의 눈빛엔 존을 기억하는 느낌이 어려 있었다.


매 에피소드 매 캐릭터를 리뷰해도 모자란 대작에서 굳이 한 캐릭터를 떠올리면 비서실장의 비서인 마가렛이다. 파일럿부터 엔딩까지 출연한 캐릭터 가운데, 대통령과 영부인을 제외하면 한 번도 직위변동이 없었던 것 같다. 마가렛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방 안에서 비서실장이 "마가레엣!" 하고 부르면 약간 들뜬 표정으로 들어와서 업무사항을 지시받고,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바보같은 소리를 덧붙였다가 면박 당하면서 나가는 게 마가렛의 역할이었다.


이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서였는데, 그래서 빛난다. 세계를 통치해야 하는 주요 관료들은 '똑똑한 멍청이'다. 큰 일은 참 잘도 처리해내는 똑똑이들이지만, 자기 주변의 사소한 일들은 온통 놓치고 마는 멍청이들. 꾸준히 사소한 것을 좇는 마가렛은, 이들에게 '가족'이나 '연애'에 대해 힌트 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때로는 '내 조언 안 들으면 시킨 일 안 해'라는 식으로 나올 때도 있었다. 


웨스트윙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다룬 드라마이지만, 한편으론 개별 캐릭터들의 이야기에도 충실히 귀 기울인다. 흥미롭게도 주요 캐릭터들 대부분이 조금씩 결손이 있다. 대통령은 다발성 경화증을 앓으며 아버지의 폭력에 트라우마가 있다. 리오는 알콜중독이고 늦은 나이에 이혼했으며 심장마비의 위험에 처했다. 조쉬는 누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가 있고 작중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진다. 샘은 외도하는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고, CJ는 치매 걸린 아버지 때문에 괴로워 한다. (대체로 아버지와의 갈등인 건 아론 소킨이 프로이트 이론을 추종해서일까? 그러고 보면 작중 프로이트의 이름이 서너 번 정도 나온 것 같다.)


마가렛은 이처럼 '큰 일을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들'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그들의 결손을 메워주는 캐릭터였다. 그러니 마가렛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늘 이런 캐릭터들에게 끌렸다. 전면에 있지 않지만 2선에서 반짝이는 캐릭터들.


이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리버럴의 이상'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흑인 합참의장, 여성 국가안보보좌관, 히스패닉 대통령, 여성 대법원장, 여성 비서실장 같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갈등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걸 어떤 판타지로 꾸며내는 게 아니라, 정치적 구도 속에서 가능할 법한 어떤 현실로 다룬다. 즉 이건 '소수자가 유리천장을 깨는 이야기'라기보다, '유리천장을 깬 소수자가 다수자들과 갈등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나는 전자의 이야기보다 후자의 이야기를 더욱 사랑한다. 현실 속에 뿌리박혀 실존하는 갈등과 차별들을 여기서는 존재하지 않는 양 제거한 전자의 이야기들에는 늘 의구심을 품게 된다. 앞서 언급한 주요 이슈들에 대해서도 웨스트윙은 후자의 방식으로 다룬다. 그래서 웨스트윙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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