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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r 11. 2017

관계맺기의 방식

라고, 또 일단 거창한 제목을 달고 시작.

-


1.

'고나리질', 개인의 의견을 관리하려 드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신조어다. 언제부턴가 이 말이 자주 쓰인다. 이 말을 가장 강렬하게 인식한 것은 페이스북 어떤 폐쇄 그룹의 규칙에서였다. 정치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만들어진 이 그룹은 서로에 대한 고나리질을 하지 말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상대의 의견이 옳지 않아 보여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곧장 고나리질로 규명돼 거부당했다. 그 내용이 옳건 그르건 상관없이. 여기서 관계맺기는 느슨한 연대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와의 관계맺기를 통한 '나'의 성장이 이뤄질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긍정이다. 


2.

이 얘기는 남성인 내가 하면 어떻게든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맨스플레인', 남성이 여성을 무식한 사람으로 선판단하면서 (여성이 요청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설명해주겠다고 나서는 태도를 나타내는 신조어다. 이는 특히 남성들이 주로 점유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영역에서 빈번한데, 예컨대 게임이나 스포츠, 공학과 같은 영역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유행하고 나니 가끔 보이는 상황이 있다. 여성이 틀리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자 남성이 반대의견을 제시하면서 토론을 시도한다. 이에 대해 여성이 맨스플레인으로 규정하며 토론이 중단된다. 나도 이런 경우를 종종 마주쳤다. 몇 번 그렇게 마주치니 온갖 군말(태클은 아닌데요,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설명하려는 건 아니고요, -인 것 같아요 따위의)을 붙여서 간신히 말을 걸거나 그냥 말 걸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을, 페미니즘과 무관하게, 고나리질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한다. 다만 상대가 남성이니 고나리질 대신 맨스플레인이 쓰인다. 관계맺기의 중단. 내 자아세계를 침범하는 것에 대한 경계. 


3.

며칠 전에 트위터에서는 이런 얘기를 봤다. "애인은 무료상담사가 아닙니다. 치료는 전문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받으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를 요구하는 건 정서적 착취입니다." 그때 봤을 때 2000 리트윗 가까이 됐으니, 지금은 조금 더 리트윗 됐을 거다. 글쎄, 애인 관계라면 상대에게 "병원 가"라고 말할 게 아니라 "병원 가자"라고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을 거면 일종의 계약 연애 같은 걸까. 연애관계라면 조금 더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고, 조금 더 기대도 된다고 생각한다. 


4.

구혜선과 안재현의 신혼일기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고함20이 리뷰를 썼는데, 구혜선이 가부장적 안재현을 "설득하고 지지하는 데 들어가는 '감정노동'"을 감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둘은 부부다. 그 둘이 결혼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보다는 훨씬 가까운, 인생의 동반자 같은 관계가 부부적 관계일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설득과 지지가 감정노동이라는,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걸까. 이 대목에서 어쩌면 고나리질과 (2번 용례에서의) 맨스플레인, "병원 가" 같은 것들이, 설명과 설득과 공감을 일종의 감정노동으로 대하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면 당연히 감정이 쓰인다.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갈등이 생기고 누군가는 인내하고 또 그러다 화해한다. 1번에서처럼 느슨한 연대의 관계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면.


5.

혼밥, 혼술은 이제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분석과 경험이 이미 존재하지만, 이를 (깊은) 관계맺기에 대한 거부감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 누군가와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건 사실 관계를 쌓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내기에게 선배가 밥을 사준다거나, 우연히 만나면 '언제 밥 한 번 먹자'고 인사 건네는 건, 정말로 '밥'에 의미가 있다기보단 그걸 매개로 이뤄지는 관계의 확장에 좀 더 의미가 부여된다. 누군가와 함께 뭘 하면 거기에 대화의 필요성이 수반된다. 귀찮고, 싫다. 무언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은 긴장감, 재밌는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 같은 것들.


6.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인간적 관계맺기의 방식을 거부하면, 남는 건 앞서 느슨한 연대관계 방식과 강력한 적대하기 방식이다. 감정은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로부터 소모되므로, 적대에는 별로 감정이 소모되지 않는다. 적대하는 관계이므로 상대가 상처입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재빠른 선긋기와 배제의 방식은 느슨한 연대가 적대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느슨한 연대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7.

친구가 소개해준 기사에 관계맺기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가 담겨 있더라. 프랑스의 여성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씨가 나눈 대화. 일루즈는 소비사회의 문제로 관계맺기를 풀어낸다.



안: 관계 또한 변했죠. 이제 사랑마저 거부하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왜 그리 어려운가요. 

일루즈: 더 이상 성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관계를 멈추죠. 다른 상대를 찾기 시작합니다. 2~3년이 지나면 시들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성적관계의 의미를 정의하면 충성이에요. 우리는 서로 충실함을 원하죠. 그러면서도 충성은 구식이라고 팽개칩니다.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에요. 두 번째는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평등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많은 남성과 여성은 평등의 가치를 염두에 두려고 하면서도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는 막막해해요. 소비사회 속에 물들어 있으니까 먼저 자기 요구를 챙기는 데 급급하죠. 상대가 내 요구를 채워주는가에 민감합니다. 이는 너에게 나를 완전히 주겠다던 19세기 모델과는 딴판이죠. 소비문화는 우리를 자기중심으로, 쾌락적 존재로 만들었어요. 뭔가 어렵거나 아프다고 느끼면, 그 쾌락이 부서지니 생경하죠. 소비자로 누리던 그 만족이 아니니까요. 

안: 우리의 사랑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갈 방법이 있을까요. 

일루즈: 좀 더 자유를 원하는 상대의 요구에 참을성을 가지자고 하고 싶어요. 오늘날 개인은 두 개의 가치를 존중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에 한 사람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일부일처제, 바로 독점적 관계죠. 이 가치는 때로는 충돌하고 함께하지 못해요. 그런데 우리의 관계를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둘이 함께 묶여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 거예요. 서로의 서약을 기억하는 감각요. 누군가와 서약한다는 의미는 기준, 규범에 대한 질문이에요. 어떤 면에서 이 두 가지는 모순된다 말할 수 있죠. 존중은 자유를 향한 상대의 요구를 받드는 건데, 서약은 묶여있다는 의미를 기억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함께하는 의미를 깊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죠. 무엇이 서로를 하나로 묶고 있는지를요.


8.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지만, 철학자 한병철이 최근에 펴낸 책 <타자의 추방>이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사두긴 했는데, 한번 읽어나 봐야겠다. 아직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이런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dire”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타자의 추방>, 107-108p)


요컨대 '잘 들어주는 것'에 대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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