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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r 19. 2017

숨그네, 비극(悲劇)적인 비극(非劇)

2016년 1학기 '현대독일문학' 에세이 과제



‘왜 굳이 살아야 하나.’ 삶에 대한 근본적 회의, 그로부터 비롯된 체념의 질문. 사람의 삶이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애쓰다 결국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며 자살하거나, 답을 미처 내리지 못하고 사고 또는 병으로 죽거나,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는 유언을 남기며 자연히 죽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되는 어떤 과정 아닐까. 그렇지 않은가. 삶이라는 것의 특성상 이 질문은 당연히 대두되고 답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삶의 현장에 놓인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아무튼 태어났으니, 살아진다.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는 순간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험을 하고 난 뒤에야 온다. 그때부터 사람은 철학을 가지게 된다. 삶이 무엇이건 간에, 또 다시 삶은 살아진다. 일반적으로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왜 굳이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도달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그 순간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주인공 레오폴트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다. 언뜻 봐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도 어려운 ‘숨그네’라는 단어는 그 대답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고귀하고 영예로운 죽음’을 택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한 상황에서는 ‘왜 굳이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대두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뮐러는 ‘숨결이 그네 뛰며 일어나는 심한 착란현상’(『숨그네』, 97쪽)이 결국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거칠게 말해볼까. 희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삶을 산다. 희망이 희박해지면 삶은 무너진다. 하지만 절망할 틈조차 없으면 삶은 그저 살아진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능동과 수동이 교차해 만드는 결론이다.


희망이 있는 한 살아남는다, <그래비티>


『숨그네』 얘기를 하기 전에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자. 영화 <그래비티Gravity>(2013) 얘기다.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간단하다. 우주에서 조난됐다가 지구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스톤 박사’는 지구로부터 600km 떨어진 우주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다. 갑자기 작동하지 않는 위성을 고치는 임무라, 우주복을 입고 우주선 밖으로 나와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곳에서 운석에 부딪혀 파괴된 위성의 잔재가 탐사대를 향해 날아든다. 돌아갈 우주선은 파괴되고, 스톤 박사는 조난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지구와의 통신은 끊긴다. 완전한 적막.


베테랑 우주인 ‘매트’는 조난 직후부터 스톤 박사를 이끌어 주는, 일종의 멘토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모종의 사고로 매트가 삶의 ‘끈’(탈출용 우주선에서 스톤 박사를 거쳐 매트 박사를 이어주는, 말 그대로 ‘끈’)을 놓아야만 스톤 박사가 살 수 있는 상황이 닥친다. 그러자 매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끈을 놓곤 공허한 우주 속으로 밀려난다. 남은 것은 스톤 박사와 우주의 고요함뿐. 스톤 박사는 끈을 붙잡고 마침내 탈출용 우주선으로 들어가지만, 연료가 바닥나 지구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완전한 절망.


지구와 통신을 시도하지만 주파수는 맞지 않고, 엉뚱하게도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아닌강’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과 통신이 연결된다. 스톤 박사는 절박하게 ‘메이데이’를 외치지만, ‘아닌강’은 마치 통신 상대자의 이름을 ‘메이데이’로 이해한 것 마냥 “메이데이? 아닌강!”을 반복할 뿐이다. 이 통신 너머 ‘아닌강’이라는 인물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아이에게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스톤 박사는 체념한 것처럼 자장가를 따라 부르며 울듯이 웃는다. 선내 산소 조절기의 작동을 멈추고, 잠든다. 삶을 포기하고, 고귀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사실은 이 장면 이전까지도 스톤 박사가 삶에 어떤 미련이 남아 그토록 살기 위해 투쟁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스톤 박사는 이혼했다. 딸이 있었지만, 사고로 잃었다. 그 이후로는 정처 없는 드라이브만을 유일한 취미로 삼으며 하루하루 낭비하듯 살아왔다. 그녀는 정말이지, 지구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 오죽하면 그녀가 우주 임무를 하는 까닭이 ‘우주의 고요함이 좋아서’일까. 그러고 보면 ‘아닌강’의 자장가에 스톤 박사가 울고 웃는 것도 그녀의 잃어버린 딸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살기 위해 투쟁한다. 희망이 있으니까. 지구에는 희망이 없지만,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있으니까.


그 희망이 완전히 말소되자 스톤 박사는 고귀한 죽음을 택했다. 살아갈 이유도,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잃어버렸으니까. 그런데 꿈결에 그녀는 탈출용 우주선을 열고 들어오는 매트를 본다. 매트는 농담하며 들어와서는 매트가 꺼버린 산소 조절기를 다시 켠다. 그러곤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잃은 것보다 큰 슬픔은 없을 거야.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 가기로 결정했으면, 계속 가야 해. 땅에 두 발을 딱 붙이고 서서 살아가는 거야.” 매트는 스톤 박사가 만들어낸 환상이고, 따라서 매트가 하는 말들은 그녀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것일 터다. 아무튼 꿈에서 깨어난 스톤 박사는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내고, 다시 투쟁해 마침내 지구로 귀환하며 영화는 끝난다.


존엄이 무너진 공간수용소


<그래비티> 얘기가 길었다. 요컨대 스톤 박사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투쟁했고, 그 희망이 희박해지자 죽음을 택했고, 다시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자 살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학자가 마르틴 하이데거다. 그는 인간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또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단어는, 그렇게 ‘있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세상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최선을 다해 살아낼 것’을 제안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다. 힘겨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의 끝이 죽음이라면,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이 무(無)라면, 아등바등 살아남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허무를 깨닫는 그 순간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다시 『숨그네』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 레오폴트는 삶에 대해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는 인물이다. 하루하루를 ‘랑데부’로 보내며, 잡혀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 무덤덤한 인물이 노동수용소에 갇힌다.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 이곳에서 그는 살기 위해 노동한다. 그는 말한다. “오 년간의 수용소 시절처럼 죽음에 결연히 맞선 적은 없었다. 죽음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건 지금의 내 삶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삶뿐이었다.”(101쪽) 그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오지 않은 삶, 그것이 어떤 삶이건, 올 삶이 있다는 것 자체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삶’을 레오폴트는 살아낸다. 여기까지는 <그래비티>의 스톤 박사와 같다.


하지만 레오폴트의 세계에서는 단절이 이루어진다. ‘뼈와가죽의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사실 그는 이 시기에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찾고자 했다. “하루의 첫 결심은 이랬다. 꿋꿋이 버티리라, 오늘은 아침에 양배추 수프와 빵을 다 먹어버리지 않으리라.”(124쪽) 눈앞의 허기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기통제를 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 결말은 이렇다.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배고픈 천사가 나날이 내 뇌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내 손을 들어올려, 그 손으로 카를리 할멘을 때려죽일 뻔했다.”(125쪽) 자기통제는커녕 ‘살인하지 말라’는 인간의 도덕률도 망각할 만큼 완전한 절망. ‘삽질 1회 = 빵 1그램’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시간.


비극(悲劇)과 비극(非劇)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순간, 레오폴트는 스톤 박사가 그러했듯 죽음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도 죽는 게 차라리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다. 수용소 동료 ‘이르마 파이퍼’가 죽었을 때, 그는 그의 얼굴에서 행복을 본다. “가장 마지막에 오는 행복은 한방울넘치는행복이다. 그 행복은 죽을 때 온다.”(276쪽) 하지만 레오폴트는 죽음을 택하지 못했다. 불운하게도 그의 옆엔 ‘배고픈 천사’가 있었다. “뻔뻔스럽게 누구에게나”(95쪽) 달라붙는 존재. 배고픈 천사의 부추김 때문에 레오폴트는 노동한다. 일하고, 먹고, 잔다. 삶의 의미를 검토하고 죽음의 선택을 검토할 틈이 레오폴트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살아지는’ 삶. 이것이 수용소의 삶이다. 이 삶은 비극(悲劇)이 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극적인 면모가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비참한 일상, 그래서 비극(悲劇)적인 비극(非劇).


『숨그네』는 바로 이 비참한 일상을 반복적으로, 지독하게, 필요 이상으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다. 단적으로, 각 장의 제목들은 대체로 어떤 사건보다는 수용소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고 있다. 명아주, 시멘트, 나무와 솜, 차, 완고한 사람, 손수건, 심장삽, 배고픈 천사…. 오직 비참한 일상에만 천착하고 있어서다. 살아지는 삶에는 스펙터클이 없다. 반전도 없고, 고조도, 추락도 없다. 때문에 『숨그네』는 끔찍하게 지루한 이야기지만, 바로 그 지루함이 오히려 뮐러가 의도적으로 그려낸 정서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왜 굳이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깊이 숙고할 수 있는 삶을 그려낼 것인가, ‘그저 살아지는’ 삶을 살아내며 아무런 철학적 질문도 던질 수 없는 삶을 그려낼 것인가. 반전과 고조와 추락이 있는 비극(悲劇)을 쓸 것인가,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는 최저의 비극(非劇)을 쓸 것인가.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껏 간과돼 온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답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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