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드나무 Mar 30. 2017

의문사, 과거사에 대한 메모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아포리아는 "길-없음"이다. 하지만 길이 없다는 것이 해결방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아포리아는 "실제로 불가능한, 여전히 생각할 수 없거나 생각해본 적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바로 그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불가능성이야말로 가능성을 사고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하지만, 불가능성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데리다는 우리를 곤란에 빠뜨렸던 한계들을 '그 자체로' 표시하는 동시에 지우는 것이 아포리아에서의 길-찾기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불가능성에 대한 바로 그 원리를 알리는 동시에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그것들을 뒤쫓는" 것이 우리가 더 전진할 수 없는 논리적, 실천적 불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아포리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의문사) 진상규명운동의 입장에서 국가기구에 의한 의문사 진실규명이 실패한 과정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기록하는 작업이 의문사 진실규명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추적하고 탐색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은 법과 국가기구만 만들면 의문사의 진실규명이 당연히 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기 위해서, 동시에 국가기구에 의한 의문사 진실규명을 불가능한 것으로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요구된다.

사무엘 베케트는 <최악을 향하여>에서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고 썼다. 이 말은 실패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실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패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충실성'이란 "과정의 이름이다. 사건 그 자체의 정언명령 하에서 상황에 대한 지속적 탐구가 바로 그 과정의 관건이 된다."

현 시점에서 진상규명운동에 요구되는 것 또한 국가기구에 의한 의문사 진실규명이 어떠한 과정으로 실패했는가에 대한 충실한 탐구와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실패의 결과보다는 어떠한 한계들로 실패했는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크 데리다가 말했듯이, 애도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실패하기, 실패하기를 잘 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역시 실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관심은 우리를 아둔한 존재의 늪에 빠뜨리는 반면,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잘 실패하고 과감하게 실패하는 것이 성공의 가능성을 여는 힘이 된다면, 실패의 경험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 반드시 축적해야 하는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의문사 문제는 왜 '기억의 정치'가 아닌, '애도의 정치'로 접근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의문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의문사는 애도와 기념 또한 불가능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의문사는 기억하기 이전에 애도할 수 있는 조건조차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의 정치'가 아닌 '애도의 정치'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국가폭력 사건인 것이다.

... 애도작업의 기능은 개인적 차원의 슬픔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례를 수행하는 데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애도는 "유품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죽은 이들을 어떤 장소에 배치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죽은 자의 삶과 죽음을 정확히 알고 그의 삶과 죽음에 합당한 장소에 매장을 할 때, 비로소 애도가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애도작업이 언제나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애도작업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죽은 자의 신원에 "혼동이나 의심"이 생겼을 경우나, "죽은 자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뭔가를 빠뜨리고 거절했을" 경우다. 애도가 잘못 이루어지거나 충분하지 못할 경우, 죽은 자가 '유령'의 형태로 되돌아올 위험이 있다는 데 애도작업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유령이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떤 사물(chose)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 혹은 이미지다. 그것은 "어떤 응시,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항상 불가능한 어떤 응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며, "누군가의 죽음에 적절한 의식이 수반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갑자기 사로잡는 이미지"로 감지된다. 애도의 주체가 사회적 의식을 수행함에 있어 죽은 자에 대한 예우와 격식에 부족함이 없도록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죽은 자가 이러한 유령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애도작업의 개념으로 보면, 의문사는 애도가 불가능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 의문사는 죽은 자의 삶과 죽음을 알 수 없음으로 인해서 어디에 어떠한 자격으로 묻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 죽음이며, 추모의 의식을 통해서 상징화하기 어려운 죽음이다. 요컨대 의문사는 애도작업에서 가장 나쁜 경우, 죽은 자가 유령의 형태로 되돌아올 위험이 대단히 높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 사건과 애도의 정치」, 정원옥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은 정치적 폭력 이후의 상황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의 중요성에서 현재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뉘른베르크는 가장 적절한 판단 형태는 재판"이라는 명제를 옹호한다. 2차 세계대전 이래 과거 국가폭력을 다루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뉘른베르크 재판이었고, 반인도범죄에 대한 보편적 사법권 원칙은 물론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의 국제형사재판에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등장은 이행기 정의 실현의 주요 경로가 형사소추라는 견해를 강화해 왔다. 남아공 '진실과화해위원회(TRC)'는 재판과 처벌 중심의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를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이로써 '정의(justice) 대 불처벌(impunity)' 구도로 진행되던 이행기 정의 논쟁이 '정의' 대 진실규명, 화해 구도로, 즉 응보적 정의 대 회복적 정의 구도로 초점이 바뀌었다. TRC는 진실위원회를 재판의 차선책이 아닌 회복적 정의를 진전시킬 기반으로 규정하고 기존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회복적 정의는 범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에 초점을 두는 재판방식이 지닌 한계를 강조하고, 폭력의 역사적 패턴에 초점을 둔 진실을 추구한다.


나치 태동기 독일에서 역사철학자 블로흐는 "과거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새로운 삶을 약속"한 나치에 "대중들마저 몰려가는" 현상을 바라보며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눈에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왕년의 것들, 그리고 그와 복잡하게 연루된 것들을 유지시키고 있다."

마르크시스트 블로흐가 본 것은 압축적 후발산업화의 시간에 가난한 농민계급과 토지귀족 융커, 몰락하는 중산계급과 대자본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비동시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같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블로흐는 당시 "현재 시간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주관적 모순"과 "현재 시간에 적절하게 어울리지 않는 객관적 모순"이 현재의 시간과 동시성을 이루지 못한 채 존재한다고 보았다. 전자는 현재의 시간을 원치 않기에 활기를 잃은 것이므로 주관적으로 비동시적인 모순이고, 현재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과거 시간의 유물은 객관적으로 비동시적인 모순이 된다. 주관적으로 비동시적인 모순은 '울분'으로 나타나고, 객관적으로 비동시적인 모순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로 존재한다.

블로흐는 이 두 요소, 즉 주관적으로 비동시적인 모순과 객관적으로 비동시적인 모순의 결합에 의한 '반동적 동시화 운동'을 우려했다. 히틀러가 이러한 비동시성의 모순들을 묶어내 나치의 시간으로 동시화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독일의 상황에 대한 블로흐의 진단이었던 것이다.


「한국 이행기 정의의 딜레마」, 박현주

매거진의 이전글 숨그네, 비극(悲劇)적인 비극(非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