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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pr 05. 2017

제갈량놀음

방구석에 앉아 앞으로 정치판이 이렇게 저렇게 흘러갈 것이고 누구는 이런 선택을 해야 하며 그런 결정은 잘못한 것이며 하는 말들을 나는 '제갈량놀음'이라고 부른다. 우선 별다른 영향력도 없이 방구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는 걸 쟁쟁한 정치가, 전략가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예측이 틀림으로써 돌아오는 유무형의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무말이나 지껄여놓고는 판이 바뀌면 반성도 없이 금세 다시 아무말이나 지껄이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또 이런 일이 재밌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나도 오늘은 제갈량놀음을 한번. 불확실할 때 미리미리 공개적인 곳에 적어놔야 나중에 "거봐, 내가 뭐랬어" 해도 들이밀 증거가 생기는 법이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거봐, 내가 뭐랬어" 하면 사람들은 한심하게 쳐다본다. 반전 없는 각본보다는 역시 반전 드라마가 재밌기 때문에 이 놀음은 2위 후보 안철수를 대상으로 한다. 지지하는 건 아니다. 지지 후보 없다. 심상정을 비판적으로 지지할 수는 있다.


1.

문재인은 대세라고 하지만 지금의 지지율, 그러니까 35%-40% 선에서 오락가락한 지 꽤 됐다. 민주당 경선에서 계속 승리가도를 달렸음에도 특별히 지지율이 더 올라갔다는 소식이 없으니 '드라마 없는 경선'의 결과로 컨벤션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중도보수에서 극우에 이르기까지 반문정서는 실재하고,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문재인의 '안보관념'을 의심하는 것도 제법 보편적인 정서 중 하나라고 본다. 홍준표를 지지하는 10% 내외의 유권자들은 어쩌면 본선에 닥칠수록 '문재인 말고 될 사람', 즉 안철수를 전략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보수후보에 대한 포지티브한 지지보다, 문재인에 대한 네거티브한 반대가 우선될 수 있다고 본다. 문재인에게 확장성이 없다는 말은 비방이 아니라 사실적시에 가까워 보인다.


2.

안철수의 포지션은 독특하다. 진보라면 진보고, 보수라면 보수다. 여느 때 같으면 보잘 것 없는 후보일 텐데, 보수 쪽에 명쾌한 후보가 없고 진보 쪽에도 이렇다 할 존재감을 가진 후보(심상정은 존재감 있는 정치인이지만, 존재감 있는 후보는 되지 못하고 있다)가 없는 상황이라는 게 문제다. 이런 상황에선 여기 붙이면 이렇게 되고 저기 붙이면 저렇게 되는 안철수 같은 후보가 나름대로 표를 모을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모아가고 있다. 민주당 경선이 끝나자 이재명과 안희정의 표가 문재인으로 쏠리지 않고 오히려 바깥으로, 안철수나 심상정에게 분배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덴 문재인 지지자들의 불쾌한 행보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문의 경선 독주는 무의미했지만, 안의 경선 독주는 '불안정해 보이는 정치인에게 안정성을 주는' 효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둘 다 컨벤션 효과는 별로 없어도 이미지를 바꾸었느냐에 대해서는 안철수가 좀 더 나았다는 점. 문재인과 안철수의 지지율 격차가 줄어들수록 그 추이는 점점 빨라질 수 있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한 집단은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 또는 '정권교체를 이뤄줄 후보'이기 때문에 문재인을 지지하고 있다. 안철수의 당선 가능성이 오를수록, 문재인의 정치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닌 이들 집단은 쉽게 안철수에게 건너갈 수 있는 표다.


3.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홍준표-안철수의 단일화는 독이다. '정권교체'라는 절대명분이 자유한국당과의 단일화가 이뤄지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안철수를 지지하는 집단 중 일부도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사람들임을 감안하면, 홍준표와의 단일화는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지 절대 플러스가 되지 못한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홍준표를 지지하는 표들은 때가 되면 전략적으로 안철수에게 올 수 있는 표다. 굳이 단일화라는 정치적 부담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홍준표라는 통제 안 되는 입이 문재인을 향하고 있는 상황 역시 안철수에겐 이득이다. 하지만 단일화 국면에 들어가면 그 입은 안철수를 향할 것이다. 단일화 전투에서 승리해도 대선 전쟁에선 패하게 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예측불가의 미친놈은 피해가는 게 답이다.

4.
안철수 입장에서 바른정당 유승민과의 단일화는 하면 좋고 말면 마는 것. 어차피 유승민을 지지하는 표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중도보수 층에게 '안철수는 보수 후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표를 끌어오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만큼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중도진보 층의 표는 얻지 못하게 될 터다. 두 그룹에 대한 면밀한 비교분석을 통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면 될 일 같다. 다만 이슈몰이용 기획은 될 수 있다. 치열하게 게임을 벌이면 문재인에 쏠릴 관심을 성공적으로 끌고오고, 컨벤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5.

심상정은 반드시 완주하겠다고 하니, 딱히 더 덧댈 말이 없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격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수록 심상정에 대한 문빠들의 압박도 심해질 거다. 그러면 나름대로 존재감이 생길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결정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생기게 된다. 정권교체가 절실한 상황도 아니니, 예전처럼 무조건 중단할 게 아니라 나름대로 딜을 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문재인과 안철수의 격차보다 심상정의 지지율이 더 높아져야만 한다. 약속한 대로 완주를 할 수도 있다. 이게 오히려 덜 부담스러운 결정일 것이다. 어쨌든 안철수로 명목상 정권교체는 일어난 것이고, 민주당의 비난이야 패배자들의 남탓으로 돌리버리면 그만이다. 지금 새로 정의당에 유입된 지지층을 붙잡는 것이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심상정이 해야 할 최선의 판단 아닐까.


6.

김종인-정운찬-홍석현의 빅텐트 기획은... 잘 모르겠다. 국민들이 별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탄핵 정국으로 제도권 정치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촛불을 대변하지 않는' 제도권 정치에 대한 혐오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심화됐다는 생각이다. 한편에서는 김진태 말고는 다 역적이라며 정치혐오를 폭발시키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냉소사회의 문법인 구매와 불매만이 남았다. 정치인들이 여기에 얼마나 반응할지를 잘 모르겠다. '국민 정서'와 '여의도 정서'의 거리가 아득히 먼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정작 여의도 정서는 그 거리가 멀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국민 정서와 저 기획의 의미를 완전히 오판해서 휩쓸려 들어가면, 오히려 국민 정서의 철저한 냉소와 조롱 속에 이번 대선은 문재인 독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7.

뭐가 됐든 정책이 이슈되지 않는 대선이라는 게 아쉽다. 작년 대선엔 그래도 경제민주화라는 모호한 대상을 두고라도 논쟁했지, 이번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적폐 청산만을 얘기하고 있다. 박근혜가 싼 똥을 치우면 좋은 나라 되나. 정상적인 나라가 될 뿐이다. 한국적 기준에서 정상적인 나라도 그리 좋은 나라는 못 된다. 구도 놀음도 좋지만 중요한 건 대선이 끝나고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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