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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y 04. 2017

사표는 없다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한 후보에게 던져진 표를 ‘사표’라고 부른다. ‘죽은 표’라는 뜻이다. 한 사람만을 선출하도록 하는 단순다수제 선거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역시 한 사람만을 뽑는 이번 한국 대선에서도 ‘사표론’은 여지없이 불거졌다. 당선되지 못할 후보에게 투표해 사표를 만들지 말고 당선될 후보를 조금 더 밀어주자는 것이다. 선거에서 ‘살아남는’ 것이 당선되는 것뿐이라면 사표론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선거의 전부인가? 사표론을 꺼내기에 앞서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


최근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후보가 있었다. 장 뤽 멜랑숑, 좌파적 정체성을 표방하고 나선 후보다. 투표 결과 4위에 그쳐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사표론에 따르면 그에게 던져진 표는 ‘죽은’ 셈이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를 ‘멜랑숑 현상’이라고 부르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유권자들이 새로운 정치를 좇았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뤘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멜랑숑이 700만 표 가까이 득표한 것은 분명히 그렇게 읽힌다. 작년 미국 대선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그랬다. 심지어 그는 당내 경선도 통과하지 못했다.


동아일보.


샌더스를 후원한 백수십만 명은 헛돈 쓴 걸까. 멜랑숑을 지지한 700만 명은 사표를 던진 걸까. 누구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샌더스와 멜랑숑을 지지한 이유는 명료했다. 그들은 낙선했지만, 그들을 현상으로 만든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선거 이전에는 필리버스터쯤은 해야 언론의 관심을 받던 샌더스는, 이제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언론이 주목하는 영향력을 갖추게 됐다. 멜랑숑과 그의 지지자들은 결선투표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 마크롱이 당선되길 바라는 주류 정치세력은 그들이 한때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멜랑숑의 입만 바라보는 형편이 됐다. 결과적으로 샌더스와 멜랑숑이 영향력을 갖기 원한 유권자들은 목적을 달성했다. 헛돈을 쓰지도, 사표를 던지지도 않은 셈이다.


선거는 공직에서 일할 사람을 가리기 위한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의사를 표로써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매 선거가 끝날 때마다 세대별‧지역별‧성별 등 유권자들을 세세하게 나눠 각각의 투표성향을 일일이 분석하는 이유다. 낙선자에게 던져진 표라도 시민들의 의사가 충분히 표현됐다면 그 표는 ‘살아’ 있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의사가 정확하게 의미화되도록 여론을 형성하는 작업이다. 샌더스 현상과 멜랑숑 현상이 주류 기성정치에 대한 반발이라고 의미화된 것처럼 말이다. 의미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면 심지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조차 ‘살아있는’ 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투표율 미달로 무산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그렇다. 25%라는 투표율을 두고 ‘정치적 무관심’으로 해석하는 언론은 없었다. 의도적인 보이콧 운동에 따른 결과라는 의미를 운동진영이 잘 조직하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물론 실질적으로 일할 사람을 뽑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다. 선거에서 당선돼야만 사회적 의미를 제도적 내용으로 바꾸는 힘을 갖출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표론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사표론의 전제는 ‘이번에는 될 사람을 뽑고, 소신투표는 나중에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이란 건 없다. 정치제도를 바꾸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도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사표론의 악순환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입증됐고 지금도 입증되고 있는 바, 지금의 정치제도로 이익을 보는 정치세력들은 이 상황을 바꿀 의지가 없다. 결국 정치는 힘의 논리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이들을 힘으로써 압박하지 못하는 한 사표론은 쓰러지지 않는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언제 끊을 것인가. 지금이다. ‘나중’은 없다.


지금의 정치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은 많으면서 실제로 의지를 보이지는 않는 정치세력을 효과적으로 움직이려면 그들에 맞설 세력에 힘을 실어주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언급한 선거의 다른 목적을 떠올려야 한다. 기존의 정치세력이 지금의 정치제도에 기반한 이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는 ‘의미’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또 다시 사표론이 제기된 지금이 적당한 때다. 인풋이 있으니 아웃풋을 의미화할 조건이 마련됐다. ‘양보해야 할 세력’으로 지목된 세력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지지를 받는다면 그 자체로 사표론을 극복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지지를 받아 안을 세력 또한 자신들이 상징하는 시대정신을 명징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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