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드나무 May 23. 2017

정치인의 자녀들

1.

정치인의 자녀는 으레 특혜를 받을 거라는 인식은 적어도 오늘날에는 상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혜가 음지에 숨겨져 있을 수 있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기자도 많고 의도치 않게 노출되는 정보도 많다. 정치인의 자녀는 정치인 본인이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닌 까닭에 리스크도 있다. (그래서 정치인 본인이 입는 특혜는 여전히 만연해 있을 수도 있다. 정보의 노출을 최소한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높은 자리를 지향하는 정치인이라면 함부로 자녀에게 특혜를 줄 수 없다. 자녀 문제, 특히 교육과 병역과 취업에 관한 자녀 문제는 온 국민의 역린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이 이 지점에서 마이너스를 받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녀 특혜'의 정점에 있었던 정유라의 어머니가 최순실이라는 '민간인 비선'이기를 선호했다는 점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최순실은 공직에 오를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딸에게 마음껏 특혜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아들을 국제고에 입학시켰다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 술집에서 얻어맞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조폭을 동원해 보복 폭행을 가했다는 한화 김승연 회장의 일도 그렇다. 재벌은 선출될 필요가 없는 권력이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마음껏 특혜를 주고 정신나간 짓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여전히 정치인의 자녀가 입는 특혜가 있을 수 있다. 김무성의 경우, 자녀는 아니지만 딸의 남편인 사위가 마약 파티에 참여했다가 적발됐는데 이례적으로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또는 남경필의 아들이 군대에서 후임을 폭행, 추행했는데 집행유예를 받은 사건도 있다. 호의적으로 바라보자면, 이는 재판부가 '알아서 긴' 경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병우 아들의 의경 특혜는 어떨까? 잘 모르겠다. 우병우는 너무 예외적인 인간이다.) 정치인의 개입이 있었다고 해도 과거의 특혜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는 출발선부터 특혜를 준 거면, 이제는 특혜와 무관하게 발생한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식이다.


페이스북 캡쳐.


2.

최근 이낙연 총리 지명자와 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의 '미담'을 보고 한 생각이다. 이낙연 지명자의 아들이 어깨 탈구 사유로 신체등급 5급 판정을 받아 군면제를 받았는데, 이낙연이 “아들이 치료와 재활을 거쳐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입대하게 해주기 바라며 현역 복무가 어렵다면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며 병무청에 탄원서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특혜를 입어서라도 아들 군면제를 시켜주고 싶어하는 정치인 속에서' 면제 받은 아들을 공익이라도 보내달라던 이낙연의 이야기는 '청렴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소비됐다.


강경화 지명자의 경우는 딸의 이중국적 문제다. 외교관의 자녀로 미국에서 태어나 이중국적을 소유하다가 2006년에 미국 국적을 택했는데, 이번에 강경화의 입각을 계기로 다시 한국 국적을 취득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일반적인 '회피성 이중국적'과 다른 맥락이 있어 주목받고 있다. 어머니의 흠결을 없애기 위해 '기꺼이' 한국 국적을 다시 취득할 거라는 강경화와 딸의 이야기도 이낙연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소비됐다. 두 이야기 모두 정치인이 자녀 문제(-병역, 국적)를 감추지 않고 돌파하려는 모습이라 국민들에게 훈훈함을 준 모양이다. 나는 두 이야기를 앞에서 얘기한 맥락으로 이해한다. 특히 이낙연의 이야기는 좀 더 명료하게 그렇다. 정당하게 받은 면제라고 해도 아버지가 정치인인 까닭에 특혜시비가 일까봐 공익이라도 보내고 싶어했다는 것.


사람들은 이 두 이야기에서 '특혜를 거부하는 멋진 정치인'을 읽어내는 것 같지만, 글쎄, 나로서는 자녀들의 침해당한 자율성에 좀 더 눈이 간다. 왜 부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자녀가 복속돼야 하나. (결국 면제를 받았다곤 하지만) 정당한 이유로 면제 받았는데 왜 아버지에 의해 공익이라도 보내질 상황에 놓여야 했나. 정치인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어도 될 일이다. 원정출산이라든지 하는 이유로 취득한 것도 아닌 국적을 왜 어머니 때문에 포기해야 하나. 이 역시 어머니가 인사청문회를 통해야 하는 고위직에 입각하지 않았다면 포기하지 않았어도 될 일이다. 이낙연의 아들과 강경화의 딸이 그리 한 것이 그들의 효심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여기에는 '자녀의 모든 문제는 정치인의 문제'라는, 그래서 정치인의 자녀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발언할 수 없게 만드는 다소 과한 사회적 시선이 전제돼 있다.


ⓒ 채널A


3.

그래서 나는 문재인 대통령 자녀들의 행보가 맘에 들었다. 그의 자녀인 문준용씨와 문다혜씨는 선거운동을 거의 돕지 않아서 화제가 됐다. 문다혜씨가 끝물에만 잠시 나타난 게 전부. 그들이 어떤 의도로 선거운동을 돕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전형을 깨는 행보라서 좋았다. 물론 이는 문재인 당시 후보가 내내 지지율 1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후보의 직계가족은 선거법상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자원이다. 그러니 열세에 있는 후보라면 직계가족을 동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 규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는 후보는 배우자, 부모, 자녀 등이 선거운동을 도와 명함을 돌리는 다른 후보에 비해 불리하다”는 것.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참고기사)


2014년 재보궐에서 민주당 박광온 의원의 딸이 보여준 선거운동 방식도 흥미로웠다. 정치인 아버지의 딸로서 정체화되지 않고, 당당한 개인으로서, 그러면서도 가장 가까이서 박광온을 봐온 사람으로서 발화하는 모습들은 정말 멋졌다. 정몽준의 아들(이른바 몽주니어-)이 보여준 모습도 다른 의미로 흥미로웠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임에도 SNS라는 공개적 공간에 국민들이 미개하다고 쓸 수 있는 자율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가 서울시장 출마를 앞둔 시점에 말이다! 내 기준에서는 이 발언으로 정몽준이 대국민사과 한 것이 오히려 전근대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4.

아무튼간에, 나는 정치인의 자녀들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다. 성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정치적 의사가 정치인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치인 부모가 아무 개입을 하지 않아도 병역면제를 받을 수도 있고, 한국 국적을 버리고 자기가 살아갈 나라를 직접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한 자녀들의 결정이 정치인 부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인 자녀가 잘못한 문제에 "그건 걔가 잘못한 건데 왜 제가 사과를 합니까?" 하고 답변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우리부터 정치인과 그의 자녀를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표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