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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24. 2017

촛불 이후의 세계에서
대학을 탈환한다는 것

<오늘의 교육> 39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언제부터 학생은 대학의 주인이 아니게 됐을까. “아니, 대학의 주인이 학생이 아니라고?” 대학문화의 황금기(?)에 대학을 다녔던 기성세대 가운데는 이렇게 되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날 학생은 정말로 대학의 주인이 아니다.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은 가장 고루한 말이 됐다. 그래도 체면이 있지, 대놓고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박용성 전 중앙대학교 이사장이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시기인 2009년 8월에 박 전 이사장은 중앙일보에 ‘대학 발전과 참된 주인의식’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썼다. “대학 사회에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 교수·교직원·학생들이 각자 대학의 주인이며, 주인의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러고는 이렇게 이어간다. “냉철히 말하면 학생은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다. … (학생이) 경계를 넘는 주장이나, 지나치게 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명백하게, 그는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다음 인용을 보자. “대학의 의사결정권은 학교법인에서 비롯되고, 운영 주체는 학교법인의 이사회로 보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이렇게도 썼다. “필자는 운영 면에서는 대학도 기업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 경영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대학의 주인은 학교법인 이사회이며, 이사장이라는 얘기다. 이 글은 ‘대학 기업화’의 모뉴먼트였다. 1997년 성균관대를 삼성이 인수하고 2005년 고려대가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LG-포스코 경영관’에 ‘이명박 라운지’와 ‘이학수 강의실’을 만드는 것으로 살금살금 손을 잡아온 대학과 기업이 마침내 ‘대학 기업화 시대’를 만천하에 선언한 기점이다.


한국일보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시급한     


 박 전 이사장의 선언 이후 지금까지, 숱한 대학에서 기업화가 이뤄져왔다. 취직 안 되는 ‘쓸모없는’ 학과들을 폐지하거나 이리저리 합쳐 괴상한 이름의 학문단위를 만들어내는 구조조정이 연일 이슈에 오르고, 학생 자치는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공연히 학교를 시끄럽게 해 ‘대학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탄압당하고, 기업에 인력을 배급하기 위한 목적의 계약학과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대학 기업화가 하나의 주류적 현상이 되자 이를 폭로하고 분석하는 책들도 하나둘 발간되기 시작했는데, 『김예슬 선언』, 『기업가의 방문』, 『괴물이 된 대학』 등 자퇴하거나 퇴학당한 학생들의 자전적 기록을 담은 저서들과 『진격의 대학교』, 『교육불가능의 시대』 같은 저서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기업으로부터 어떻게 되찾을 것인지 이야기하는 책은 없었다. 2016년 10월부터 12월까지 경희대학교 잔디밭에서 해직강사인 저자가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쓰인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오늘날 대학의 문제들을 노동·학생·교수·정치 등의 측면에서 성찰·비판하는 한편, 어떻게 대학을 탈환할 것인지를 논한다. ‘해직강사’라는 신분, ‘경희대학교’라는 공간, ‘2016년 10월부터 12월까지’라는 시점이 ‘탈환’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한다.


 대학사회의 여러 구성원 가운데 가장 취약한 지위에 놓인 것이 시간강사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시간강사는 “노동의 권리도 교육의 권리도 인간의 존엄도 유보되어 있는 존재”다. 시간강사가 이러할진대 아예 대학이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난 해직강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해직강사가 대학을 탈환하자고 대학 안의 구성원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올라온, 그러므로 가장 급진적인 연대의 요청이다. 후마니타스칼리지의 설립으로 “중앙대의 반대편에서 인문주의형 대학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이 경희대학교다. 이처럼 ‘점잖은’ 공간에서 대학을 탈환하자는 주장이 나왔다는 것은 ‘모든’ 대학이 탈환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강의가 이뤄진 시점은 저자의 주장이 놓인 조건을 암시한다.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정권을 ‘민주주의의 힘’으로 무너뜨린 승리감에 전국이 고취돼 있던 시점이다. 하지만 광장의 열망은 각자의 현장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이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뤄진 강의는 ‘우리가 정말로 탈환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명확한 질문을 대학에 던졌다. 요컨대 탈환의 정치학은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시급한 것이다.      


참세상


대학은 모두의 것이라는 선언     


 박용성 전 이사장이 ‘대학은 법인의 것’이라는 선언으로 대학 기업화 시대를 열었다면, 저자는 ‘대학은 모두의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대학 탈환의 시대를 열고자 한다. 이전까지 통용되던 ‘대학은 학생의 것’이라는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선언이다.


 박 전 이사장의 선언은 대학 기업화의 근거라기보다는 귀결이었다. 두산이 중앙대를 인수했을 때, 그리고 박 전 이사장이 ‘기업적 개혁’을 선언했을 때 다수 대학 구성원들은 반겼다. ‘대학은 법인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반면 저자의 선언은 대학 탈환의 귀결이라기보다는 시작점이자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대학’은 모두의 것, 즉 대학은 사회 전체의 공공성을 위해 복역하는 공동체이므로 지금 기업의 이익을 위해 복역하는 대학은 문제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대학은 ‘모두의 것’, 즉 학생들과 교수들과 강사들과 노동자들이 대학의 주인이므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주장해야 한다. 대학은 ‘모두’의 것, 즉 이사회라는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아니다. 단 구성원들이 고립된 개인으로 머물지 않고 ‘모두’라는 이름으로 뭉칠 때에만 대학을 탈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저자는 이렇게 대학의 공공성을 선언한 뒤 좀 더 정밀하게 들어간다. 대학에서 학생이 어떻게 소비자로 전락했는지를 짚고 어떻게 학생이 다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을지를 제언하며, 교수에 관해서는 스스로를 ‘직원’ 정도로 인식하거나 ‘업자’로 전락한 교수들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식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같은 주장을 위해 민주주의와 대학의 근원을 탐구한다. 그것들이 어떤 개념으로 탄생했으며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짚고, 우리가 ‘원래 그런 것’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최근의 변화인지를 폭로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대학에서의 교육과 정치의 의미를 재규정하고, 마침내 ‘탈환’의 당위에 다다른다.      


냉소하는 얼굴들넘어야 할 최후의 관문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이 공공성의 관점이다. 기업화되는 와중에도 대학이 가진 근원적 공공성이 최악의 변질만은 막는 최후의 브레이크로 기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용성 전 이사장 같은 별종을 제외하면 어떤 기업가도 ‘대학은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대학의 이사회가 기업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릴 때도 그것이 사회 공익에 기여한다는 포장지를 덧대지 않으면 금세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몇몇 대학에서 계획됐던 학문단위 구조조정이 백지화된 것도 같은 이유다. 대학에서 기업화에 맞서 싸울 때 ‘대학은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은, 비록 관념적일지인정, 중요한 명분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그런데 이 믿음이 다름 아닌 대학 구성원으로부터 무너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세력화’를 이뤄야 할 학생들이 ‘대학은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고루한 주장으로 격하되고 냉소의 대상이 된다면? “대학이 원래 이런 거 아니었어요? 다들 어차피 졸업장 따러 오잖아요.” 이런 반문이 캠퍼스를 지배할 때 대학을 어떻게 탈환할 수 있을까. 나아가 정치세력화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조건에서 말이다. 슬프게도 이는 먼 미래에 대한 우려가 아니다. 이미 도래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이다. 


경향신문


 대학이 공공재가 아니라는 인식은 심지어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말하는 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2016년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반대 투쟁에서 대두된 ‘외부세력 거부론’이 그랬다. 대학이 공적인 것이고 ‘모두의 것’이라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은 무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화여대 학생들은 끝내 ‘외부세력’을 상정해 거부함으로써 이화여대를 이화여대 구성원들의 사유재로 전유했다.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말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이화여대 학생들만의 것도 아니다. 대학생들은 여전히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근거를 물으면 “등록금을 내니까”라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이라는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로 자기 위치를 잡고 있는 것이다.


 ‘정치세력화’라는 저자의 방법론에도 고민은 남는다. 2016년 이전까지 탈환의 기획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은 대학 사회에 만연한 패배주의였다. 아무리 싸워봤자 대학본부를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과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그 구조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아남겠다는 경쟁의식이 국지적인 투쟁들을 고립시키곤 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탈환의 기획을 곤란에 빠뜨리는 건 다름 아닌 승리감이 만들어낸 도취일 것이다. ‘외부세력’을 거부했지만 승리를 거둔 이화여대와, 대표됨을 거부한데다 ‘선’도 넘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둔 촛불집회. 단기적인 승리는 가능하게 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이런 거부들이 승리에 의해 승인된 ‘새로운’ 세계에서의 급진적 기획을 우리는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이들을 아우르는 정치세력화를 이루고, 냉소하는 대학생들에게 공공성이라는 당위를 설득할 것인가.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이후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이다.


>>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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