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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Nov 05. 2017

Remember, Remember.

11월 5일을 맞아 <브이 포 벤데타>를 다시 봤다.

리멤버 리멤버. 가이 포크스 데이를 맞아 <브이 포 벤데타> 영화를 한 번 더 봤다. 이번이 세 번째 감상인가 그렇다. 혁명에 관한 풍부한 상징과 은유, 그리고 미묘한 디테일까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 더불어 나는 이 영화를 '가장 완벽한 혁명영화'로 꼽는다. 


물론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이 영화엔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만 묘사될 뿐, 경제적 착취라든지 제국주의 등의 모순은 드러나지 않거나 아주 피상적으로만 묘사된다. 하다 못해 권력자의 탐욕을 묘사할 때 아주 진부하게 써먹는 장면들, 호의호식과 문란한 성생활 같은 표현들도 성직자-종교권력을 비난하기 위해서만 드러날 뿐, 정작 최고 권력자인 서틀러나 크리디는 정말이지 '순수하게 억압적인' 통치자로서만 그려진다.


따라서 브이가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만들어낸 혁명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완전하지만, 영화가 구현해낸 세계에서는, 즉 전체주의가 최종심급인 세계에서는 더 없이 완전하다. 그러니 굳이 이 혁명의 한계성 같은 걸 현실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또한 역사 속의 '가이 포크스'가 그렇게 급진적인 인간이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으나, 아무렴 어떠랴? 전혀 급진적이지 않았던 그를 급진적으로 전유해서 혁명의 아이콘으로 세우는 것은, 불완전할지언정 유용하다.


아무튼 이 영화에 나타나는 혁명의 상징과 은유들은 충분히 완벽하다. 예컨대 브이가 도미노를 무너뜨리는 모습, 똑같은 가면을 쓴 수십만의 군중이 광장을 지배하는 풍경, 이 혁명을 매개한 브이는 마지막 상징을 무너뜨리는 화약불이 되어 사라지고, 명령체계가 마비된 상황에서 감히 그 군중에게 총구를 겨누지 못하고 무력화되는 경찰과 군인들(-이들은 항복한 것이지, 군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촛불시민이 가장 심각하게 착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거다) , 그럼으로써 마침내 광장을 통치하게 됐을 때 가면을 벗고 개별성을 드러내는 군중들, 완성되는 혁명. 


그리고 이 영화는 혁명 이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의장이 죽고, 당수도 죽고, 주요 권력자들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폭탄은 의사당이라는 상징을 무너뜨렸고 민중은 체계를 무너뜨린 데서 끝난다. 원작 팬들이 이 영화가 원작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지워버렸다고 비판하는 걸 많이 봤는데, 글쎄, 이 상황 자체가 아나키즘의 이상 아닌가? 물론 영화는 그 이후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바로 그 이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임을 은밀하게 말하고 있다고도 느껴지지만.


이것저것 다 제치고라도 고개의 까딱거림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휴고 위빙과, 대체배우를 생각할래야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치를 충분히 보증한다. 특히 나탈리 포트만이 아니었다면 '이비' 캐릭터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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