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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Oct 11. 2017

"미국이 전쟁을 얘기할 때, 남한은 몸서리친다."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번역했다.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로 유명한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했다. 한강이 한국어로 쓴 글을 그의 맨부커상 파트너인 데보라 스미스가 영어로 번역해 실었는데, 찾아보니 한강이 쓴 원글이 보이지 않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 없는 것 같더라. 오랜만에 영어도 읽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시도할 겸 하여 내가 직접 번역을 시도해봤다. 영어 못난이라서 틀린 부분이 더러 있을 수 있다... 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한국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거라, 다시 옮기는 작업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지만 그래도 여전히 틀린 건 있을 것이다.


※ 메모: 한강이 쓴 한국어 원문이 최근 <문학동네>에 기고됐습니다. 원문과 뉴욕타임스 칼럼 사이에 편집된 부분들이 존재한다고 하네요. 단지 분량을 맞추기 위한 편집도 있지만, '대리전'에 대한 서술은 맥락을 많이 해치는 편집이었다는 문제제기가 있어 링크해둡니다. 저 역시 이런 문제제기에 동의합니다. 사실 원문이 공개됐으니 이 포스팅은 폐기해도 괜찮겠습니다만, 그냥 제 연습 삼아 번역한 것이니 남겨두도록 할게요. (2017. 12. 15)



<뉴욕타임스> 원문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ㅡ There is no war scenario that ends in victory.



"미국이 전쟁을 얘기할 때, 남한은 몸서리친다."

- 승리로 끝나는 전쟁 시나리오는 없다.     



며칠 전에 마주쳤던 뉴스 기사에서 생각을 돌릴 수가 없다. 70대의 한 남자가 실수로 두 개의 두툼한 돈뭉치를 길바닥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 이 돈뭉치를 우연히 발견하고 나눠가진 두 사람은 경찰에 붙잡혀서, 돈을 포기해야 했고 절도죄로 기소됐다.  


여기까지는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남자가 그렇게 많은 돈을 운반해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날까봐 두려웠어요." 그는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은행에서 돈을 뽑아다가 집으로 가져오던 길이었죠." 그는 그 돈이 손자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지난 4년간 매달 조금씩 저축해 모은 것이라고 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나서, 전쟁은 이 남자의 청소년기 내내 지속되는 경험이었다.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본다. 전쟁 이래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온 한 남자가, 모아둔 돈을 뽑으러 은행에 가는 기분. 공포, 불안, 무력감, 긴장.  


그 남자와는 달리, 나는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지금까지도 남한 사람이 북한 사람과 만나거나 연락을 취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우리 같은 전후 세대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가끔 아주 비현실적인 무엇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성적으로, 나와 다른 남한 사람들은 평양이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것과,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그저 잠시 멈춘 것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나는 북한이 실재하는 걸 알고 있고, 망상이나 신기루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걸 확인하는 것이 지도나 뉴스를 통해서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나와 나이가 비슷한 동료 작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DMZ가 가끔 바다처럼 느껴진다고. 반도가 아니라 섬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이 이상한 상황은 60년이나 지속돼 왔고, 남한 사람들은 긴장감, 그리고 무관심과 긴장상태의 모순적 느낌에 마지못해 익숙해져왔다.  


이따금씩 외국인들은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한다고 말한다. 남한을 제외한 세계가 북한을 두렵게 지켜볼 때도, 남한 사람들은 너무 침착해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해도,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할 가능성이 보도되는 와중에도, 남한의 학교와 병원과 서점과 꽃집과 극장과 카페들은 모두 일상적으로 문을 연다. 작은 아이들은 노란 학교버스에 오르고, 창문에 대고 부모들에게 손을 흔든다. 좀 더 큰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고, 그들의 머리카락은 씻고 덜 말려 아직 젖어있다. 그리고 연인들은 꽃과 케이크를 들고 카페로 향한다.  


이런 평온함은 남한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가 보는 것처럼 정말로 무관심하다는 뜻일까? 모두들 정말로 전쟁의 공포를 초월한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수십 년간 쌓여온 긴장감과 공포가 우리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몇 달 간, 우리는 매일매일의 뉴스와 신경과민 속에서 이러한 긴장감이 점차 커지는 걸 목도해 왔다. 사람들은 집과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공습 대피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추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과일박스가 아닌, 손전등, 라디오, 의약품, 비스킷으로 채운 "생존가방"을. 기차역과 공항에서, 전쟁과 관련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 긴장감 어린 얼굴로 텔레비전을 본다. 그게 (전쟁이) 우리와 함께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걱정한다. 우리는 북한이 국경 너머에서 다시 핵실험을 하고 방사능이 유출될 수도 있다는 직접적인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점점 고조되는 '말의 전쟁'이 '전쟁'으로 확대되는 현실을 두려워한다. 아직 보고 싶은 날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반도의 남쪽에 5천만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70만의 유치원생들도 포함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저 '숫자'에 지나는 문제가 아니다.  


MBN.


이처럼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남한 사람들이 침착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도, 물론 우리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북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재자들과 그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상황에 전체적으로 반응하려고 애쓴다. 누구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로서, 이런 오래된 질문은 지금 우리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계엄령에 맞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독재 정권이 군대를 투입했던 1980년 광주 항쟁을 다룬 나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면서, 나는 광주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보스니아,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로까지 조사범위를 넓혀야 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특정한 시공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세계사에서 드러난 보편적 인간성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잔혹하게 해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폭력에 직면해서도 그들의 인간성을 절대 잃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야만과 존엄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조사과정 동안 내가 깨달았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는, 모든 전쟁과 대학살에는 인간이 타인을 "인간 이하"로 인지하는 임계점이 있다는 것이다. 국적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음의 깨달음 역시 동시에 왔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은, 이 모든 편견들을 이겨내고, 타인의 고통을 완전하고 진실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단순한 동정을 넘어서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자유의지와 행동이 매순간 우리들에게 요구된다는 사실.  


한국전쟁은 이웃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수행한 대리전쟁이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잔혹한 3년 동안 잔인하게 살해됐고, 국토는 완전히 파괴됐다. 공식적으로 우리의 동맹인 미군이 비극적인 전쟁에서 남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여러 사례들이 비교적 최근에야 분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잘 알려진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미군 병사가, 주로 여성과 아이들인 수백명의 시민들을, 돌다리 아래로 몰아넣고, 며칠 동안 양쪽에서 총을 쏴서, 그들 대부분을 죽였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들이 남한 피난민들을 "인간 이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들이 타인의 고통을 완전하고 진실되게 받아들였다면, 존중받을 만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런 것들이 가능했을까?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날마다 미국에서 온 뉴스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를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듣고 있고, 아주 익숙하게 위태롭게 들린다. "우리에겐 몇몇 시나리오들이 있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남한 사람 2만 명이 매일 죽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전쟁은 절대 미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은 한반도에서만 난다."


Channel A.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오직 대화와 평화를 통한 해법을 말하는 남한 정부에 미국의 대통령은 말한다. "그들은 오직 하나만 이해할 뿐이다." 이건 정확한 의견이다. 한국인들은 정말로 하나만 이해한다. 평화가 아닌 해법은 무의미하며, "(전쟁을 통한) 승리"란 공허한 슬로건일 뿐인데다 터무니없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또 다른 대리전을 분명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지금 여기, 한반도에.


다가올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난 겨울의 촛불을 떠올린다. 매주 토요일이면, 남한 곳곳의 도시에서, 부패한 정부에 맞서 수십만의 시민들이 모여들어 시위하며 함께 노래했다. 종이컵에 꽂은 촛불을 들고, 대통령은 하야하라고 소리치면서. 나 역시 거리에서 나의 촛불을 들어올렸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촛불집회" 또는 "촛불시위"라고 불렀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촛불혁명"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오직 사회를 촛불이라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변화시키길 바랐고, 결국 이를 현실로 만들어낸 사람들ㅡ아니, 그저 나약하고 순수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존엄을 지닌 수천만의 인간들ㅡ은 카페와 찻집과 병원과 학교의 문을 매일같이 열면서, 매순간 새로이 밀려오는 미래를 향해 한 번에 한 걸음씩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누구인가, 이들에게, 평화가 아닌 다른 시나리오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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