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라는 말이 등장한 건 주지하다시피 2016년 즈음부터다. 언론지면에서는 2016년 11월 이후부터(네이버 검색 기준), 학술계에서는 2017년부터나 논의되기 시작한 주제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가짜뉴스라는 주제어는 기존의 ‘허위사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새로운 개념어로 대두됐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다른 성격이라 함은 어떤 허위사실이 실리는 ‘매체’에 관한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가짜뉴스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은 어떤 허위사실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언론매체의 이름으로 기사의 꼴을 갖춰 나왔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어떤 허위사실을 단순히 텍스트의 형태로 옮긴 게 아니라 언론의 권위를 빌려 전달했기에 그 파급력이 막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명이 가짜‘뉴스’인 거다.
내멋대로 규정해보자면, 이런 점에서 나는 가짜뉴스가 가진 파급력의 원인이 ‘언론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권위로부터 지지받고 싶은 욕망’에 있다고 믿는다.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들에게 언론은 하나의 지적 권위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생각(가짜뉴스 대부분이 약자를 공격하는 데 목적을 둔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편견’)에 권위를 부여해줄 대타자인 것이다.
그들은 언론 자체를 불신하지 않는다. 심지어 태극기 노인이라도 한겨레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해가 되는 사실을 보도하면 기꺼이 그것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극성 문빠라도 조선일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보탬이 되는 사실을 보도하면 기꺼이 그것을 인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불신받는 건 '나의 생각과는 다른 보도'일 뿐이다.
가짜뉴스의 원인이 '언론에 대한 불신'에 있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최근 한겨레신문의 '가짜뉴스 공장' 기사를 바라보면 가짜뉴스라는 개념어의 사용은 다소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다. 에스더기도행동이 어떤 언론의 꼴을 통해 허위정보를 유포한 것이 아니라 카톡이나 밴드, 교회 홈페이지, 유튜브 같은 경로로 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투데이가 이들의 가짜뉴스를 적극적으로 퍼나르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등록'된 언론사라는 점에서 그냥 쓰레기 언론일 뿐이지 가짜뉴스는 아니다.)
하지만 권위로부터 지지받고 싶은 욕망이 가짜뉴스의 근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에스더의 그것은 틀림없이 가짜뉴스다. 종교야말로 대타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신의 말을 전한다는 목회자로부터 허위정보가 유포되었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그 말을 믿고 퍼다 날랐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이 그 사람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믿어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결국 문제는 사람들이 권위로부터 지지받고 싶어하는 그 ‘생각’이 무엇이며 그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다. 중간고리를 과감히 생략해도 될 것 같은데, 그 생각이란 물론 ‘살기 힘들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짜뉴스를 뿌리는 자들은 “저놈들 때문에 힘든 것이니 저놈들을 조져야 한다”고 선동함으로써 그 생각을 해소시킨다(고 믿게 한다). 하지만 역시 중간고리를 과감히 생략해도 될 것 같은데, 우리가 살기 힘든 건 ‘저놈들’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살기 힘든 게 누구의 책임이며, 따라서 무얼 해야 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 결국 가짜뉴스의 근원과 해법은 모두 정치라는 얘기다. 정치 또한 하나의 대타자가 될 수 있다. 권위에 의해 지지받고 싶은 대중의 욕망을 제거할 수 없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지성주의적 방식'이 너무나 오래 걸려 난망한 작업이라면, 결국 '옳은' 대타자를 세우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여기서부터는 뻔한 얘기. 물론 여기까지도 뻔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박권일씨가 뉴스민에 썼던 글("가짜뉴스의 뿌리의 뿌리")이나 지젝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가짜뉴스에서 거대한 거짓말까지"), 장석준쌤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엘리티즘'은 지고 '포퓰리즘'이 뜬다")들을 내 식대로 풀면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