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프랑스편-4)
템플기사단의 금고를 프랑스 왕들은 거리낌없이 사용했지만, 그건 빚이었다. 그것도 막대한 빚으로 쌓였다. 그 빚은 7차 십자군을 일으킨 ‘성왕’ 루이 9세의 유산이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살라딘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전쟁없이 되찾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교황청이 파문하자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자진해서 7차 십자군을 일으킨다.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유일한 황제국가인 신성로마제국이 정작 교황청과 사이가 틀어지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자, 유럽의 새로운 강자가 되고 싶었던 프랑스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루이 9세는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머리는 그다지 치밀하지 않았다. 무작정 덤벼든 이집트에서 대파당하고 자신도 포로로 잡혀 엄청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맘루크가 신흥 세력으로 발호할 빌미를 주면서 십자군이 성지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루이 9세의 도전은 완벽한 실패였다. 누가 뭐래도 파문감이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당연한 대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엄청난 빚을 졌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의 재기불능 패배를 부르면서 프랑스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지만, 상황을 단박에 뒤집은 이는 루이 9세의 손자, 필리프 4세였다.
왕은 먼저 교황부터 손을 봤다.
필리프 4세는 교황청의 충실한 세속군주로 인정받고 싶었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교황청과 최소한 대등한 관계 이상의 독립군주를 지향했다. 할아버지가 완벽하게 망쳐놓은 십자군은 오히려 좋은 계기였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청의 권위가 한없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교황은 중세 체제를 연명하기 위해 1303년 시대착오적인 칙서 <우남 상크탐>을 먼저 반포한다. 교황이 군주들 위에 군림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필리프 4세는 이를 거부한다. 발단은 프랑스의 속국인 플랑드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자 반란의 싹을 없애려고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국가 재정은 이미 비어있는 터라, 모자란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매기고, 거부하면 재판에 부쳤다. 가톨릭을 겨냥한 도발적인 조치에 교황청은 분노했지만, 힘이 없었다. 뒷배를 받쳐준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를 스스로 허물어버린 결과였다.
교황은 할 수 없이 프랑스를 상대로 거래를 시도한다. 우선, 그의 할아버지 루이 9세를 ‘성자’로 시성하는 당근책을 내놨다. (십자군 실패에 대한 프랑스의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성직자에 대한 과세는 눈감아 주겠지만, 왕이 사제를 재판하겠다는 시도만큼은 안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교황청은 파문까지 들먹이며 선을 넘지 말 것을 협박했지만, 필리프 4세에게 역습을 당한다. 프랑스군이 교황의 여름궁전에 쳐들어가 교황의 뺨을 때리고 모욕을 준 것이다. 분을 이기지 못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한 달 만에 죽고 만다. 유명한 아나니 사건이다.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1세 역시 임기 시작 1년도 되지 않아 간식으로 무화과를 먹고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차기 교황이 된 사람이 바로 프랑스 대주교, 클레멘스 5세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압력을 받아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고, 아비뇽에서 교황청을 연다. ‘아비뇽 유수’가 일어난 것이다. 이로부터 68년간(1309~1377) 7명의 프랑스인 교황들이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머물게 된다. 드디어 필리프 4세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프랑스 왕의 허수아비가 된 교황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매일 연회를 개최하고(이 덕분에 아비뇽 근처 론 계곡 지역에 포도주 산업이 번창하게 된다. 지금도 ‘새로운 교황청’이란 뜻의 ‘샤토뇌프-뒤-파프(Chateauneuf-du-Pape)’라는 고급와인이 유명하다), 면죄부나 팔면서 신의 대리인 역할 놀이를 하는 게 전부였다. 1347년 발병한 흑사병으로 불과 6년 만에 유럽인구의 1/3이 사망했지만, 신의 대리자라는 교황은 무기력했다. 대중들은 교황의 실체를 간파했고, 교황청의 권위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당시 교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비뇽에 남아있는 교황청 건물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빼곡한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주치는 50m 높이의 육중한 건물은 불시착한 외계인의 우주선만큼이나 생경하다. 벽 두께만 자그마치 4m다. 한눈에 봐도 이건 방어용 성채다. 권위를 상실한 권력자들이 늘 그렇듯, 교황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거나 신비주의 전략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교황을 세상과 격리시키고픈 프랑스 왕의 의도가 반영됐을 수도 있다. (왜 아비뇽이었을까? 아비뇽은 교황이 토벌했던 카타리파의 중심지역 한가운데였으니 왕의 의도를 알만하다. 교황에겐 아비뇽이 아마도 창살없는 감옥이었을 테니!)
아비뇽 교황청은 투박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화려했다. 지금은 볼만한 게 많지 않지만, 다양한 상징들을 하나하나 직접 그려 넣은 타일로 알록달록 장식한 바닥을 보면 벽이나 천장의 사치스러움은 더했을 테다. 현재 25개 정도의 방들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 대예배당을 비롯해 교황의 거처와 무덤 등이 미로처럼 연결된다.
입장권을 사면 오디오 가이드가 딸린 아이패드를 나눠주는데, 이것을 휑한 방에 들이대면 당시 모습을 가상현실처럼 보여준다. 문화재를 어설프게 복원하기보다는 이런 방식으로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기발하다. 우리도 황룡사처럼 폐허로 남은 유적지에 시도해보면 좋겠다. 암튼 한국어 서비스가 없다는 점만 빼고는 덕분에 아이들이 집중해서 둘러볼 수 있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교황의 거처나 접견실 등에서 계속 눈에 띄는 게 있으니 바로 프랑스 왕가의 백합문장(fleurs-de-lis)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려고 학교마다 황국신민서사비를 세웠던 것처럼, 백합문장은 교황에게 자신의 비굴한 처지를 암묵적으로 자각시켜 주었을 것이다.
이제 교황은 처리했고......다음은 템플기사단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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