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석 Apr 24. 2023

비밀맛집7: 템플기사단이 최후를 맞은 파리 자비오섬

28/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프랑스편-5)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새벽, 어제까지만 해도 필리프 4세의 여동생 장례식에서 프랑스 왕과 점잖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세를 과시하던 템플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 자크 드 몰레와 기사단 간부들이 전격 체포되었다. 더 나아가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템플기사들을 급습했다. 죄목은 이단 행위와 신성모독. 프랑스 종교재판소를 앞세워 순식간에 2천여 명의 기사들이 파리로 압송됐다.


   세상은 수군거렸고, 덕분에 13일의 금요일은 700년이 흐른 지금도 불길함을 상징하는 낙인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그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사실일까? 나중에 교황청이 조사한 바로는, 일부가 사실이었다. 실제로 신입 기사들은 입단식에서 십자가를 짓밟고 침을 뱉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자크 드 몰레는 신심이 깊은 기사들이 이슬람의 포로가 된 이후의 극단적인 상황극을 통해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도록 하는 훈련에 불과했다고 강변했다.


   그 밖의 다른 대부분의 죄목들은 허위일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흑염소 머리를 가진 바포메트란 악마를 숭배했다는 혐의는 고문으로 만들어진 허위자백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사들이 진술한 바포메트의 형상이 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바포메트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잘못 옮긴 것이다)


   심지어 말 한 마리에 2명의 기사가 탄 기사단의 문장까지 공격받았다. 청빈한 생활과 전우애의 상징이 순식간에 동성애의 표식으로 바뀌었다. 인류의 10%가 동성애자라고 하니 템플기사단에 왜 없었겠냐만, 그건 성지수호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결혼도 마다하고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용맹한 기사들을 졸지에 파렴치한으로 만들어 존재 자체를 싸그리 부정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사진5-14. 템플기사단의 공식 인장 ©Thomas Andrew Archer, Wikipedia 발췌)


   따라서 그들에게 적용된 죄목이 합당한 지 여부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으면, 하다못해 걸음걸이나 말투에서라도 꼬투리를 잡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 죄목은 무조건 기승전 ‘이단행위’여야만 했다. 그게 프랑스 왕이 교황의 직속 기사들을 직접 체포할 수 있는 유일한 죄목이기 때문이다. 80년 전에 카타리파를 소탕하면서 프랑스의 협조가 필요했던 교황청이 프랑스 종교재판소에 부여했던 특권이었다. 이를 십분 활용해 기사단의 일부 독특한 관습과 행동을 이단이라 몰아붙이기로 한 프랑스 왕은 한 달 전부터 기습 체포 명령을 비밀리에 하달해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키프로스에 있었던 기사단의 수뇌부를 어떻게 프랑스로 유인할까였다.     


   아비뇽의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스스로 무덤을 파주었다. 교황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권위를 되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가 낸 꾀가 새로운 십자군 파병이었고, 필리프 4세에게 지휘관을 맡아달라 부탁했다. 신이 원한다는데 왕이 거절하기 쉽지 않을 거라 계산했을 테고, 교황의 명령에 왕이 복종하는 모양새를 갖추면 교황의 위신도 회복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더구나 필리프 4세가 전장에서 승리하면 더욱 좋고, 목숨을 잃으면 더더욱 좋으니 그야말로 꽃놀이패였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교황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왕은 일단 승낙하는 척하며 자신이야말로 교황이 간곡히 부탁할 만큼 기독교 세계를 수호할 유일한 영웅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그러면서 곧바로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교황 직속인 템플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을 통합하여 자신이 지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였다. 파병에 필요한 비용과 군사동원에 교황도 협조해달란 의미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교황의 수족을 잘라내는 동시에 엄청난 재산과 군대를 얻겠다는 계산이었다. 절묘한 신의 한 수였다. 승낙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어 난처해진 건 교황이었다.    

 

   상황은 필리프 4세의 뜻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교황은 1307년 5월 양 기사단장을 아비뇽으로 불러 통합을 논의했다. 당연하겠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키프로스에서 프랑스까지 온 자크 드 몰레는 내친 김에 파리에 있는 프랑스 지부에 들렀다. 제 발로 걸어들어온 먹잇감을 필리프 4세는 놓치지 않았다. 기사단이 통합되면 더 좋았겠지만, 기약도 없는 일을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단박에 무너뜨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교황 클레멘스 5세의 허를 찔렀다.     


   필리프 4세가 템플기사단을 타겟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주로 경제적 측면이 자주 거론된다. 빚도 크게 지고 있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을테니 말이다. 왕은 잉글랜드와 플랑드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탈리아 금융업자들과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하고 자산을 압류해 전쟁자금으로 조달하기도 했다. 그러니 템플기사단의 재화에도 눈독들일 만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은 기사단의 재산을 극히 일부만 회수하는 데 그쳤다. 프랑스 바깥에 기사단이 소유한 재산에는 손도 대지 못했는데, 교황의 발빠른 대처(?)로 템플기사단 재산 일체가 구호기사단에 양도되었기 때문이다. 템플기사단에 졌던 빚이 자연스레 탕감되었다는 게 그나마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일 것이다.


   이에 반해 정치적으로 얻은 건 더 많아 보인다. 더이상 의지할 곳을 없애면서 교황을 완벽한 종이호랑이로 만든 건 최고의 성과였다. 게다가 교황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모든 행위에서 면책을 받는 무리가 자신의 영지를 활보하고 다니는 통에 암살과 반란의 잠재적 두려움에서도 완전히 해방되었다. 실제로 왕은 자신이 만든 질서를 방해하는 어떠한 상황도 용납하지 못하는 편집광적인 완벽주의자였다. 포스트 중세는 절대왕권이 정답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냉혹하고 잔인했다. 미남왕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지만, 누구도 왕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례로, 왕은 첫째와 셋째 며느리가 간통을 저지르자 불륜의 상대 귀족 자제들에게 왕의 권위를 더럽힌 죗값을 톡톡히 물었다. 산채로 성기를 뽑아 개 먹이로 던져줬고, 사지는 본인의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잘라냈다. 그런 왕에게 통제할 수 없는 템플기사단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은 절대왕권의 걸림돌이었으니, 기사단의 몰락은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궁지에 몰린 교황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1312년 4월 유럽 각국에 템플기사단을 모두 해체하라는 명령을 시달한다. 이제 템플기사단의 목숨은 필리프 4세의 손에 쥐어졌다. 왕은 1314년 3월 18일, 템플기사단 그랜드마스터 자크 드 몰레(Jacque de Molay)와 노르망디 지부장 노프루아 드 샤르네를 기어코 화형대에 세웠다.      


   화형장은 세느강의 작은 섬, 자비오에 차려졌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네프를 걷다보면 강 한복판에서 시테섬과 만나게 된다. 한쪽에선 노트르담 성당과 콩시에르 주리가 보이고, 반대편은 평범한 공원이다. 파리지엥들이 관광객들을 피해 휴식을 즐기는 명소로 알려진 베르갈랑 공원이다. 이제는 시테섬과 하나가 되었지만, 이곳이 예전 자비오 섬이었다.


   퐁네프 다리 중간쯤 앙리4세의 기마상 뒤에 공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여느 공원과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지만, 한켠에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증언해주는 자그만 기념동판이 있다. 거기서 자크 드 몰레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자크 드 몰레는 결연하게 화형대에 올랐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불꽃이 숨통을 끊어놓기 직전, 필리프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1년 안에 다같이 하느님 앞에서 판결을 받자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형식 한 달 후, 멀쩡하던 교황이 갑자기 사망한다. 7개월 후에는 프랑스 왕도 사냥 도중 심장마비로 돌연사한다. 그의 세 아들이 뒤를 이어 차례로 왕이 되었지만, 독살을 당하거나 남자 자손들이 모두 일찍 죽으면서 결국 14년 만에 카페왕조는 무너지고 만다. 모두들 그의 저주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사진 5-15. 자크 드 몰레의 화형식 삽화 ©Workshop of Virgil Master, Wikipedia 발췌)


   카페왕조의 뒤를 이어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지만, 왕조의 명칭은 달라도 이들 로열 패밀리 역시 필리프 4세와 같은 혈통이다. 필리프 4세가 뿌린 절대왕정 체제는 태양왕 루이 14세 치하에서 절정에 다다랐지만, 곧이어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종언을 고한다.


   그리고 필리프 4세의 후손인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된 루이 16세의 머리가 단두대에서 굴러떨어지자 누군가 외쳤다고 한다.      


   “자크 드 몰레여, 당신의 원수를 드디어 갚았도다!”     


   그때가 1793년이었으니 자크 드 몰레의 화형 이후 무려 480년이나 지났지만, 사람들은 절대왕정이 끝나고서야 템플기사단의 복수가 종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템플기사단을 절대왕정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여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프랑스인들 사이에 기사단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사진 5-16. 퐁네프 다리 교각에 있는 자크 드 몰레의 기념동판 ©이경석)
(사진 5-17. 자크 드 몰레의 화형장소를 안내하는 베르갈랑 공원의 표지판 ©이경석)


(29화에서 계속, 글이 괜찮았다면 '구독하기'와 '좋아요'를 꾹~눌러주세요~!)

*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파리 지도 ©https://maps-paris.com)



[사진출처]

사진5-14. By Thomas Andrew Archer, Charles Lethbridge Kingsford - The crusades; the story of the Latin kingdom of Jerusalem, p. 176,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921154

사진5-15. By Workshop of Virgil Master - This file has been provided by the British Library from its digital collections. It is also made available on a British Library website.Catalogue entry: Royal MS 20 C vii,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67371

이전 15화  (보너스 여행) 프랑스왕의 승부수, 아비뇽 교황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