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프랑스편-3)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전 유럽에 동시다발적으로 퍼진 것과 달리, 고딕건축은 탄생 과정이 명확하다. 12세기 중반, 생드니 성당에서 시작해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거쳐 13세기 사르트르, 아미앵 등에서 완전한 형식을 갖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딕양식은 파리와 근교 도시들(흔히 일-드-프랑스라 부르는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그래서 고딕양식은 초기에 ‘프랑스 양식’이라 불리기도 했다. (고딕성당이 전 유럽에 퍼진 것은 14세기가 되어서다.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이나 프라하성당, 비엔나 슈테판성당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지역은 당시 프랑스 왕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때 프랑스 왕은 타이틀만 왕이었지 파리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영주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고딕 초기를 주도했던 성당들은 교황청 대주교가 관할하는 대교구(archdiocese) 성당이 아니었다. 오히려 프랑스 왕가의 주요 의식이 치러지는 성당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딕을 처음 선보인 생드니 수도원의 쉬제 원장도 루이 6세의 친구이자 루이 7세의 스승이었으니, 교황보다는 왕가에 더 가까웠다)
결국, 고딕양식의 출현은 도시를 무대로 자신의 권능이 교황청을 능가한다는 걸 새롭게 등장한 신진세력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프랑스 왕가의 욕망과 맞닿아있다.
그런데 프랑스 왕가가 무슨 돈으로 고딕성당을 올렸을까? 이 지점에서 템플기사단이 등장한다.
기사단은 성지 예루살렘 상실로 성지 수호라는 본래의 창단 목적은 무색해졌지만, 여전히 유럽 각지에 700여 개가 넘는 궁전과 성을 소유한 글로벌 부동산 금융재벌이었다. 특히 기사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던 만큼, 기사단은 유럽대륙에서 가장 큰 지부를 파리에 건설했다. 위치는 세느강 북쪽의 마레지구.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탕플(템플) 역에 내리면 남쪽으로 탕플(Temple) 거리가 이어진다. 이 거리를 한변으로 해서 브리타뉴(Bretagne) 거리와 샤흘롯(Charlot) 거리로 둘러싸인 널따란 블록이 기사단의 파리지부가 있던 터다.
지부는 원래 습지였던 곳을(‘마레’가 ‘습지’란 의미) 12세기 후반에 메워서 조성했다. 높다란 담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안에 가장 중심 건물은 현재 템플 광장과 템플 시장 자리에 걸쳐 있었다. 특히, 13세기 말에는 높이가 50m 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돌출탑(템플타워)도 추가했다. 용도는 바로 기사단의 금고.
프랑스 왕은 이 금고를 마치 개인 소유처럼 사용했다. 한마디로, 템플기사단 파리지부는 프랑스 왕가의 재무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딕 성당을 짓기 위한 자금 출처도 바로 여기였다!
안타깝게도 템플기사단 파리지부 터에는 그들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 체포명령을 내리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파리지부를 급습했고, 기사들을 돌출탑에 가뒀다. 물론, 탑 안에 보관되던 재화들은 모두 압수했다. 어쨌든 템플기사단이 일망타진 당한 이후에도 파리지부의 건물들은 상당기간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템플기사단 몰락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정부는 단두대로 보내기 전까지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돌출탑에 가둔 적이 있었다. (이후 앙투아네트는 시테섬의 콩시에르쥬리로 다시 옮겨진 후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이곳은 권력을 되찾고 싶은 왕당파의 순례장소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왕가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킬만한 모든 장소를 없애버리면서 돌출탑도 헐어버렸다. (탑의 위치는 템플광장과 파리3구역 구청 사이의 유젠수플레 거리에 조그만 표식으로만 남아있다) 그래서 현재로선 거리나 건물에 남은 ‘템플’이라는 명칭 외에는 마레지구에 기사단과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없다.
고딕성당의 재원에 대한 실마리는 찾았는데, 그 획기적인 기술의 난데없는 출현은 어떻게 된 걸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역시 템플기사단과 연관 짓기도 한다. 기사단이 돈뿐만 아니라 앞선 기술도 프랑스 왕가에 제공했다고 믿는다.
즉, 기사단이 템플마운트에서 발견한 성배는 금은보화가 아니라, 고대로부터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지식(비밀스런 지식, 즉 비전)이었다는 것이다. 기사단이 템플마운트에서의 7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갑자기 유럽에 돌아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바로 그때 고딕건축이 갑자기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고딕 성당이 성배를 비밀로 전승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고, 여기에 기사단이 습득한 지식이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전 로마네스크 건축은 목수나 석공같은 기능공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했다면, 고딕건축은 전문기술을 가진 건축장인 그룹이 형성되어 조직적으로 참여한 최초의 건축양식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템플기사단 이후 다빈치나 뉴턴 등이 기사단의 비전을 수호하기 위해 시온수도회 같은 비밀결사의 수장으로서 활동했다는 <다빈치 코드>의 주장으로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곧 설명하겠지만, 이는 템플기사단과 프리메이슨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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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5-9 : Map of Gothic Architecture (legalhistorysources.com)
사진5-10 위 : By Hoffbauer, Théodor-Joseph-Hubert nach Brezet - Théodor-Joseph-Hubert Hoffbauer. Paris à travers les âges, Paris: Firmin-Didot 1882, Abb. 13,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80024
사진5-10 아래 : By anonymous - https://www.parismuseescollections.paris.fr/fr/musee-carnavalet/oeuvres/le-donjon-du-temple-vers-1795-actuel-3eme-arrondissement,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41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