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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Apr 17. 2023

고딕건축은 어디서 왔을까?

25/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프랑스편-2)

   고딕건축의 갑작스런 등장에 여러 사람들이 나름의 해석을 시도했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에서 첨두아치와 장미창으로 이루어진 정면의 모습, 그리고 부유하듯 가벼우면서도 절제된 빛이 감싸는 내부 공간을 여성의 생식기 혹은 자궁에 대한 메타포로 읽어냈다.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여성(성배) 숭배를 표현하기 위해 고딕건축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의 수많은 고딕 성당의 이름이 노트르담(Notre Damn, ‘우리의 귀부인’이란 뜻)이라는 여성형으로 지칭되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그 귀부인은 통상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고 당연스레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한편, 20세기 초 독일의 위대한 미술사가인 어윈 파놉스키는 저서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에서 스콜라철학이야말로 고딕건축이 출현하게 된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교부철학은 신앙 자체를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자연적 진리로 인식한 반면, 스콜라철학은 신의 존재를 인간의 논리로 입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스콜라철학은 인간을 단지 신의 피조물로서 하등취급하지 않고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보기 시작하면서 중세 이후 계몽주의의 토대를 제공한다. 


   파놉스키는 고딕건축이 이러한 스콜라철학의 논리적 사고체계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기둥과 뼈대가 공간을 잘게 나누고, 나뉜 공간들이 다시 모여 대공간으로 통합되는 형태가 스콜라철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구현했다는 거다. 성당을 가득 메운 빛도 성령으로 충만한 영적인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이다. 머릿속 관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갑자기 기술(건축)이 발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근저엔 기술이 철학에 종속된 것이라는 오래된 편견도 살짝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철학적 사고를 가능케 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그러한 역사적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에펠탑이 그러했다.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세운 이 거대한 탑이 유명해진 것은 단지 철이라는 이색적인 재료가 표현한 곡선의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다. 


   당시 사람들은 탑에 설치된 나선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충격적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시시각각 달라지다니!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 한방향의 익숙한 풍경 대신 조각난 사진을 모자이크하듯 동서남북 사방의 풍경이 관람객이 시야 속으로 한꺼번에 실시간 접속됐다. 화가 들로네가 그린 <에펠탑 연작>은 이러한 시각적 충격을 담아냈다. 


   에펠탑은 절대자의 고정된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투시도적 세계관을, 중심도 없고 같은 공간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각들이 모두 존중되는 입체파적 세계관으로 확 바꿔버렸다. 20세기초 사회 전반에 아방가르드(기존의 모든 걸 부정하고 완전 새로운 혁신을 추구하는 전위적 경향)의 불꽃을 당긴 가히 혁명적 기념비라 할 만하다.


(사진5-7. 좌 : 파리 에펠탑 ©이경석, 우 :  들로네가 그린 에펠탑 연작 중 일부)


   건축가가 창조해 낸 새로운 공간에서 전에 없던 전혀 다른 관념을 잉태시킬 수 있는 건, 건축이 가진 특별한 힘이다. 고딕건축도 그러했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압도적인 스케일의 공간에서 지상에 구현된 천상을 떠올렸고, 내부를 가득 채워 무거운 중력을 와해시켜버린 아름다운 빛에서 드디어 신과 만났다. 어두컴컴하고 무거운 공간에서 믿음만을 외치던 지금까지의 교회와는 완전히 달랐다. 


   특별한 공간이 자각시킨 새로운 감정을 반기면서도, 한편에선 처음이기 때문에 겪는 왠지 모를 불편한 거부감도 있었을테다. 하지만, 마침 활짝 피기 시작한 스콜라철학이 이들을 안심시켰다. 신의 섭리는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에 보편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가령 그냥 물질에 불과한 빛 안에도 신성함이 존재하는데, 고딕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그 신성함을 걸러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꿈보다 해몽처럼 스콜라철학은 그렇게 이미 세상에 출연한 고딕건축에서의 감각적 경험을 옹호해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스콜라철학의 교리를 보여주기 위해 고딕건축이 고안됐다는 주장은 나에겐 앞뒤가 뒤바뀐 것처럼 억지스럽다.     


(사진5-8.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 ©Wikipedia)


   그런데 스콜라철학 자체보다도 스콜라철학이 융성해질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고딕건축이 출현하게 된 원인을 찾는 게 더 그럴듯하다. ‘스콜라’라는 단어가 학교(스쿨)의 어원이라는 점에서 보듯, 스콜라철학은 수도원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 중세시대 대학교라 볼 수 있는 수도원 학교는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신흥 자본가 혹은 자유시민의 교육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은 11~1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시대 이후 오랜만에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촉발된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이후의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아직 건재했다. 그에 비해 이슬람 세계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코르도바의 후기 옴미아드 왕조로 분열되면서 오히려 유럽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 입장이었다. 스페인은 이슬람을 상대로 11세기 말부터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가 전개되었고, 같은 시기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어 팔레스타인 지역에 라틴제국을 수립했다.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이슬람에 빼앗겼던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되찾았다. 13세기 몽골족이 침입하기 전까지 누린 상당한 기간의 평화였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식량 생산이 늘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잉여 농산물을 거래하는 시장이 생겼고 상인들이 모이면서 도시가 크게 발달했다. 개중에 영주의 지배를 받다가 나중엔 아예 영주에게 돈을 주고 자치권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봉건제에서 벗어나 신흥 자본가 혹은 자유시민이 된 신진세력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교육에 대한 열망이 분출되었고, 수많은 수도원 학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미명 아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새로운 계층의 등장은 교황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국가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프랑스 카페왕조도 그랬다. 왕가는 왕권 강화를 위해 도시와 협력하고 신흥 자본가와 유대 관계를 맺으며 이들을 새로운 지지 세력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홀연히 등장했던 것이 바로 고딕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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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파리 지도 ©https://maps-paris.com)



[사진출처]

사진5-8 : By Sandro Botticelli - Transferred from de.wikipedia to Commons by Boteas using CommonsHelper.Original uploader was Aquinat,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484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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