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이혼에 대한 집착과 변덕스런 결혼생활은 후대에 많은 놀림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궁중야사 정도의 흥밋거리가 된 지 오래다. 왕의 행동에 개인적 성정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오히려 간과해서는 안될 고도의 전략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그에게 '자유로운 이혼'은 뜻밖에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튜더 왕조는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가 개창했다. 랭커스터 왕조의 방계가문에 불과했던 튜더 가문이었지만, 헨리 7세는 요크 왕조의 여인과 결혼하며 내전(장미전쟁)을 마무리한다. (그래서 튜더 왕조는 랭커스터의 붉은 장미와 요크의 백장미를 하나로 합친 문장을 사용한다)
그가 결혼한 여인은 요크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의 조카이자 리처드 3세의 형인 에드워드 4세의 딸이다. 그런데 헨리 8세의 어머니가 되는 이 여인이 논란의 핵심이다. 이야기의 전말을 확인하려면 런던 북서쪽의 코츠월드(Cotswolds)로 가야 한다.
코츠월드는 영국의 목가적인 시골을 경험할 수 있는 유명 관광지다. 특정 마을이 아니고, 옥스퍼드와 브리스톨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을 잇는 삼각형 안쪽을 부르는 지역 명칭이다.
목초지에 안긴 마을들은 너무 예뻐 어떻게 찍든 인생샷 맛집이다.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비버리(Bibury), 버튼온더워터(Burton-on-the-water), 버포드(Burford), 치핑캠든(Chipping Campden) 등 감탄을 부르는 마을이나, 산업혁명에 맞서 수공예운동을 일으켰던 윌리엄 모리스가 살았던 브로드웨이 타워같은 멋진 명소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윈치콤(Winchcombe) 인근의 서덜리 캐슬(sudeley castle)로 향한다.
과거 로마제국 상류층 빌라 자리에 건설된 유서깊은 캐슬은 헨리 8세가 죽은 후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블러디'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를 친딸처럼 키운 곳이다. 복수심에 불탄 메리(첫 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를 피해 엘리자베스가 유년 시절 숨어 살던 방도 있고, 캐서린 파의 무덤도 있다. 정원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헨리 8세의 관련 유적답게 이곳도 귀신씌운 집이다. 유령은 계단실에서 목격되었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서덜리 캐슬이지만, 튜더 왕조에 대한 정통성 시비의 한복판에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연인즉, 모든 역사책에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라는 여성과 만나 10명의 아이를 낳고, 그중 맏딸이 헨리 7세와 결혼해 헨리 8세를 낳았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가 그 전에 엘레너라는 여성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는 주장이 논란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에드워드 4세가 중혼을 했는데 가톨릭의 정식 절차를 거쳐 엘레너와 이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왕위계승권이 없어진다.
리처드 3세는 이 논란을 근거로 에드워드 4세를 이어 왕이 된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에 가두고 왕좌에 오른다. (에드워드 5세는 이후 생사 불명이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 나온 이후, 모두들 리처드 3세가 살해했다고 믿는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불똥은 리처드 3세를 죽이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에까지 튀었다. 그가 결혼한 여성이 요크 왕조를 대표할 수 없다면 장미전쟁을 종식할 명분도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헨리 7세는 재임 기간 줄곧 반란 세력과 싸워야 했다.
튜더 왕조는 그래서 엘레너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집요하게 없앴다. 그렇게 ‘사라진 여왕’ 엘레너의 흔적은 영국에서 오직 단 한 곳에만 남게 된다. 그곳이 바로 여기, 서덜리 캐슬이다. 그녀는 원래 여기 캐슬 성주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자란 헨리 8세이기에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고 안정적인 후계구도를 위해서라면 ‘자유로운 이혼’에 그렇게 고집스런 집착을 보였던 게 당연했다.
자유로운 이혼이 왕권의 정통성에 꼭 필요했다면, 그 이혼의 대상이었던 스페인 공주, 아라곤의 캐서린과 가톨릭은 '영국의 해상무역 강국화'라는 자신의 국정철학 실현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먼저, 헨리 8세는 새로운 자금줄이 필요했다. 특히 1520년대 중반에는 캐서린이 가져온 결혼지참금도 바닥났다. 나중에는 얼마나 급했는지 수염을 기른 귀족들에게 부유세 개념의 수염세도 도입하고, 은의 함량을 1/3로 줄인 주화를 발행해 차익을 챙기는 ‘화폐 타락’까지 저지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쫓아낸다)’는 그레셤의 법칙도 여기서 나온다. 액면 가치는 같지만, 은 함량이 높은 옛날 주화들이 시장에서 모두 사라진 탓이다)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은 특정 집단에 빨대 꽂기였다. 스페인이 유대인을 추방하고, 프랑스가 템플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재산을 몰수한 것처럼 말이다. 왕은 가톨릭에 주목했다. 루터 이후 가톨릭은 비웃음을 사고 있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혼을 빌미로 가톨릭과 절연하고, 수장령에 이어 1539년에 376개의 수도원을 폐쇄시키면서 가톨릭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국유화시킨 건 예측가능한 결론이다.
다음으로 헨리 8세는 이전부터 주목해왔던 '젠트리' 계급을 자신의 정책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진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무려 여섯 명의 왕비를 맞아 이혼과 참수를 반복하는 헨리 8세를 보고 있노라면, 조선시대 숙종이 떠오른다. 당쟁이 극심한 시절 왕위에 올라 서인과 남인을 차례로 등용하며 정국을 완벽하게 장악한 왕이다. 이성적인 논쟁은 어떻게 해볼 도리라도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왕의 변덕은 성인군자라도 당할 재간이 없다. 신하들은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니 목숨을 부지하려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
가톨릭과 결별한 헨리 8세도 막강한 기득세력과 싸워야 했다. 싸움의 전략으로 왕은 설득보다 정면돌파를 택했다. 다만, 집단적 반발을 부르는 공포정치보다는 모든 게 종잡을 수 없는 개인 성격 탓으로 보이도록 했을 뿐이다.
그 변덕에 희생된 건 왕비들 뿐만 아니었다. 자신이 발탁한 세 명의 총리조차 시덥지 않은 이유로 모두 사형에 처한다.(세 명의 총리 이름이 모두 '토마스'다. 그 두 번째 토마스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다)
젠트리 계급에서만 뽑은 총리는 가톨릭과의 결별이나 이혼 문제에 있어 왕의 편을 적극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참수당한다. 이는 젠트리 계급에 대한 사실상 협박이었다. 가톨릭을 믿으며 계속 귀족 지배를 받을 건지, 왕을 따라 새로운 주류가 될 건지를 선택하라는 암묵적인 시그널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 명의 토마스는 젠트리 계급의 순교자인 셈이다.
자금줄도 만들고, 왕의 뜻을 뒷받침할 신진세력을 양성하려는 헨리 8세에게 해상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은 역시 당시 세계최강 해상강국, 스페인과의 관계정리였다.
당초 헨리 8세가 해상무역에 국운을 걸었던 자체가 스페인에 대한 도발이었다. 당연히 스페인 출신, 캐서린 왕비가 스페인과 내통하는 스파이가 되는 걸 경계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이혼 후에도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반감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니 이혼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정략결혼의 파기는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 선언과 같았다.
스페인과의 험악해진 관계는 역설적으로 템플기사단과 같이 스페인의 가톨릭 순혈주의를 거부하는 세력들에게 퇴로까지 열어준 셈이 되었다. 이것도 헨리 8세의 큰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에는 칼을 버리고 배를 탄 템플기사단의 항해지식과 경험이 밀려들었다. 16세기판 두뇌유출 사건이랄까? 17세기에는 프랑스에서 박해받은 위그노까지 몰려들면서 영국은 세계 최강의 제국을 향한 기반을 확실히 다진다.
이 모든 게 헨리 8세의 노림수였다. 좀 특이한 방식이었지만, 이혼과 변덕스런 결혼생활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헨리 8세에게 손해 보는 장사가 전혀 아니었던 셈이다.
1492년 스페인의 가톨릭 순혈주의가 촉발시킨,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수구적 공세로부터 안전지대가 된 헨리 8세의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후 곧바로 근대를 향해 직행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의 영국 분위기는 셰익스피어가 1601년 발표한 <햄릿>(물론 햄릿의 배경은 영국이 아니라, 덴마크 헬싱괴르에 있는 크론보그 성이긴 하다)에 나오는 명대사에서 엿볼 수 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불경죄 혹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신이 정해준 숙명이어야 할 삶과 죽음을 인간이 고뇌하며 선택한다니! 중세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1882년 니체가 극단적인 표현으로 ‘신은 죽었다’를 외치며 삶의 실존적 의미를 묻기 무려 삼 백여 년 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한껏 고양시켰고, 자유의지를 위해 필요한 ‘이성적 판단’을 통해 세상을 다시 해석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제시하기 시작한다. 17세기,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는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신의 존재가 전제되는 왕권신수설을 폐기하고, 국가는 개인과 계약을 통해 존재한다는 사회계약설이 등장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념은 후에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발전하는데, 당장 영국에서 이를 기반으로 찰스 1세를 처형한 청교도 혁명(1649년)이나 제임스 2세를 쫓아낸 명예혁명(1688년)이 발발한다. 이제 군림하려는 왕은 필요 없어졌다.
과학 분야의 도약은 당연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등장하여 과학적 사고의 이론적 토대를 깔아주자 아이작 뉴턴이라는 걸출한 과학자가 등장해 갑자기 근대 과학을 연다. 20대 초반이던 17세기 중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더니 미적분을 만들어 신의 영역이었던 우주를 해석하고 행성의 움직임까지 예측하게 됐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연금술을 신봉했던 괴짜였다. 심지어 요한계시록을 수학적으로 분석해 2060년이라는 지구종말의 시간까지 계산했다. 아직 비과학과 과학의 경계를 오가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뉴턴은 자신의 성과가 고대로부터 전승된 지식을 재발견한 것일 뿐이라 언급함으로써 비전을 수호하는 비밀결사와 관련 있다는 의심을 계속 받기도 했다.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그는 시온수도회의 일원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분위기 좋은 영국이라도 과학적 지식을 공유하고 발표하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유럽대륙에선 비슷한 시기 갈릴레이가 이단재판을 받고 지동설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화형을 면했다. 그만큼 과학자들에게는 살얼음판인 시대였다. 종교재판의 위세 역시 아직 맹렬했다. 이에 일단의 과학자들이 자기들만의 그룹을 만들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서로 교류한다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 무렵 소수의 비밀결사들이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대륙에서는 일루미나티나 장미십자회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영국엔 프리메이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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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