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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Jun 19. 2023

'변태남' 헨리 8세의 선택

52/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런던~에딘버러편-6)

   헨리 8세가 막 왕위에 오를 당시 영국은 약소국이었다. 백년전쟁에서 패해 브리튼섬 바깥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고, 직후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사이의 장미전쟁으로 귀족 숫자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 상황이 헨리 8세에겐 왕권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때 그는 새로운 질서에 명운을 걸었다. 가톨릭의 수호를 왕권강화의 당위성으로 풀어낸 프랑스나 스페인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선 당연했다. 가톨릭과 결탁된 봉건 귀족은 존 왕의 마그나 카르타 이후 호시탐탐 왕권의 무력화를 노렸던 만큼, 그 기득권을 굳이 옹호해줄 필요가 없었다. 대신, 봉건귀족에 맞서 그의 편이 될만한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왕은 귀족 바로 아래 하급기사의 후예이자 지주계급이었던 젠트리와 자작농이었던 요먼에 주목했다. 특히 젠트리 계급은 토지에서 나오는 부를 기반으로 상업과 금융업에 진출하고 있었다. 후에 영국의 주류가 되어 청교도의 핵심으로 의회를 장악하고 '젠틀맨'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리기까지 그들 뒤에 헨리 8세가 있었다.


   왕은 해상무역 진흥정책으로 이들의 폭풍 성장을 도왔다.     


   헨리 8세는 영국의 미래를 바다에 두었다. 우선, 해상무역은 봉건 영주들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으니 귀족의 간섭없이 손댈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다. 또한 해상무역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픽 되었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금도 영국의 테스코나 웨이트로즈 같은 큰 슈퍼마켓에서조차 영국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품이 많지 않다. 일조량이 적고 기후가 불규칙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딸기나 구스베리 같은 베리류, 감자나 당근 같은 근채류 정도를 빼고 온통 수입산이다. 그러하니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내 영지를 잃어버린 건 심각한 타격이었다. 포르투갈의 포트와인이 더 이상 먹지 못하는 보르도산 포도주를 대신해야 했던 것처럼, 해상무역은 브리튼섬에 갇혀버린 영국인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헨리 8세는 1509년 즉위하자마자 배 두 척을 건조한다. 상선이 아니라 군함이었다. 재위 기간 38년 중 14년 이상을 전장에서 보낼 만큼 국제정세가 불안한 시절이었다. 군함은 유사시 전투에 투입되고 평화 시 상선으로 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이때 건조된 군함이 유명한 메리로즈 호이다.


   메리로즈 호는 선체에 구멍을 내고 대포를 일렬로 내밀어 동시 발포할 수 있는 영국 최초의 군함이었다. 1545년 프랑스와 교전 중에 침몰했으나, 1982년 인양되어 현재 포츠머스 항구에 있는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메리로즈 호를 시작으로 1514년경에는 당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1천톤급 그레이트 해리 호를 포함, 24척이 새로 건조되었다. 대영제국의 해군이 진용을 갖춘 순간이다. 대항해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며 방대한 식민지와 동방무역을 독점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비하면 많이 늦었지만, 영국의 역사는 이제부터 새롭게 쓰일 터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조선소와 항해학교를 세우고 배를 건조하는데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갔다. 거기에 전쟁 비용도 필요했고, 패셔니스트이자 대식가답게 왕실 운영비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어떻게 조달했을까?


   물론 그의 짠돌이 아버지 헨리 7세로부터 오늘날 6천억 원 정도의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부족했다. 그래서 막대한 결혼지참금을 가져온 형수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그의 첫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형수였다. 왕세자였던 그의 형과 결혼하려고 스페인에서 건너왔다. 물론, 정략결혼이었다. 캐서린은 이사벨 여왕의 막내딸이자, 스페인 국왕인 카를로스 1세의 이모였다.(<제45화> 스페인편 참조)


   그런데 결혼 20주 만에 형이 죽자, 헨리 7세는 20주 동안 성관계가 없었다고 선언하며 왕세자와의 결혼은 무효라고 우겼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세계 최강 스페인과의 동맹관계도 유지해야 했고, 20만 두카트의 엄청난 결혼지참금도 탐났다. 두카트는 당시 유럽의 기축통화인 베네치아 금화였는데, 20만 두카트는 순금 700kg, 현 시세로 약 400억 원이다.


   결국 헨리 8세는 형수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금새 이혼하고 만다. 이혼하며 가톨릭과도 관계를 끊는다. 도대체 왜?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해 딸(나중에 '블러디 메리'로 불리게 되는)만 얻었다. 캐서린이 나이가 들자 다급해졌다. 가까스로 내전을 수습하고 튜더왕조를 연 지 50년도 되지 않을 때였다. 자신의 사후, 후사를 둘러싼 분쟁을 피하려면 아들이 필요했다. 이때 캐서린의 시녀인 앤 불린과 눈이 맞았다. 신심 깊은 왕은 교황에게 캐서린과의 혼인무효를 요청한다. 형수와의 결혼은 애초 인륜에 반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거부당한다.     




   당시 메디치가 사생아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유럽 최강자로 등장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와 동일인이다)에 대항해 프랑스 편을 들었다가 황제의 침략을 받는다. 제국군대는 1525년 프랑스군을 단숨에 격파하고 로마를 약탈한다.


   교황은 산탄젤로성으로 도망쳐 목숨만은 건진다. (스위스 용병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하면서까지 교황을 피신시키면서 교황청 근위대를 스위스인으로만 뽑는 전통이 이때 생겼다)


   그러자 프랑스가 영국과 동맹을 맺고 1527년 다시 이탈리아로 진격, 제국군대를 남쪽으로 몰아낸다. 마침내 마지막 나폴리 함락만을 앞둔 순간, 어이없는 반전이 일어난다. 프랑스 군인들이 갑자기 옷 속에 손을 넣고 등이나 다리를 북북 긁어대기 시작했다. 피를 빨아 먹는 이였다. 웃을 일이 아니었다. 이가 옮긴 바이러스로 삽시간에 티푸스가 창궐하면서 병사 대부분이 죽어갔다.


   이가 등장하며 전쟁은 나폴리 성안에 고립되어 안전하게 격리됐던 제국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하필 이때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승인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부터 영락없이 카를 5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교황이 선택할 답안은 없었다. 헨리 8세가 이혼하겠다는 아라곤의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결과를 예상한 의도적인 타이밍이었을까? 어쨌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곤충이 바꾼 역사는 생각보다 드라마틱하게 흘러갔다.         


(사진7-37. 로마 산탄젤로 성 ©이경석)


   혼인무효를 허락받지 못한 헨리 8세의 다음 조치는 가톨릭과의 결별이었다. 1534년 영국교회의 우두머리는 교황이 아닌 영국 국왕이라는 수장령을 반포하여 성공회를 세운다. 앤 불린과는 1533년 이미 비밀결혼식을 올린 후였다. 여기에 네 번의 결혼이 더 이어지면서 궁중 여인들 간의 질투와 음모 이야기가 궁중비사처럼 떠돈다. 왕은 천하의 몹쓸 변태남이 되었고, 그에게 당한 여인들은 유령이 되어서까지 구천을 떠돈다고 수군거렸다. 성공회 수립도 헨리 8세의 여성편력이 빚은 즉흥적인 결정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을까?


(사진7-38. 헨리8세와 그의 6명의 아내들, 영국 워릭성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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