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는 변덕스런 결혼생활 때문에 본의 아니게 유령 이야기의 중심에 섰지만, 역설적으로 영국의 근대를 활짝 열어젖혔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가 왕위에 있던 16세기 초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역사 전반에 걸친 격변의 시기였다. 인간을 철저히 신의 부속품처럼 다루던 숨막히던 중세가 어느 순간 해체의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 징조는 여러 분야에서 봇물 터지듯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나왔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주인공이다.
브루넬레스키가 누구인가?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 성당에 거대한 돔을 성공적으로 올리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개막한 인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끼리 경쟁했는데, 피렌체는 인근 피사나 시에나보다 훨씬 더 거대한 성당을 원했다. 이에 따라 그전까지 가장 큰 직경 43.3m의 돔을 가진 로마 판테온을 능가하는 성당 건설계획을 1367년 발표한다.
공사는 진행되었고 돔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성됐지만, 문제는 돔이었다. 무려 51년 동안 지붕 없는 상태가 지속된 것은 돔에 걸린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었다. 사실, 아무리 거대해도 고딕건축처럼 바깥에서 돔을 지지할 버트레스를 덧대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비례와 조화를 갖춘 최적의 안을 찾기 위해 1418년 설계경기를 개최한다. 이때 브루넬레스키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돔을 이중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지지대를 연결하는 해법을 내놨다. 그리고 16년의 공사 끝에 1436년 두오모가 완성된다.
성당이라는 거대 건축물에 이교도 풍의 버트레스 같은 고딕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리스-로마의 고전미를 완벽하게 구현해 낸 것이다.갑작스런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리스-로마의 형식적인 아름다움만 구현한 게 아니었다. 그 안에 깃든 인본주의적 가치도 다시 끌어냈다. 투시도를 통해서다.
기찻길의 선로는 평행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원근법에 따라 저 멀리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다루는 방법이 투시도법이다.
투시도법 개발 이전의 회화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아는 대로 그리는 일종의 상징화 혹은 관념화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부턴 모든 게 달라졌다. 신이 만물을 창조하며 바라보던 눈을 갖게 되면서 인간은 세상을 가지고 노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화가나 건축가는 절대적인 하나의 시점을 통해 신이 지상에 구현하려 했던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이렇듯 투시도가 넓힌 인식의 지평은 인간의 가치를 신의 부속품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조력자 혹은 대리인 정도에 위치하도록 만들었다. 절대적인 시점이 사라진 인상파와 여러 개의 시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입체파의 등장으로 인간 우위의 세상이 펼쳐지기 전까진 말이다.
브루넬레스키가 당긴 르네상스의 불꽃은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동시에 르네상스가 불러일으킨 인간에 대한 재발견은 새로운 시대를 태동시켰다. 인간 각자가 이성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각인되면서 교조주의적인 종교와 강압적인 봉건제도의 강력한 카르텔은 균열이 발생했다.
여기에 상공업을 토대로 자유도시가 출현하자 사람들은 신분보다는 각자의 능력으로 규정받기를 원했다. 노력하면 누구나 신의 섭리를 터득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교회가 강요하는 지식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연금술을 통해 발전한 과학적 지식이 1440년경 구텐베르크의 금속인쇄술과 결합하자 지식에 대한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한편에선 이를 부정하는 수구적 반동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마녀재판이다.
얼굴의 주근깨가 마녀의 표식이라며 외모만으로 공격당하기도 했지만, 하늘을 보고 비 예보를 했다든지 병을 고치기 위해 약초를 달여 약을 제조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등으로 많은 여성들이 대거 마녀로 몰려야 했다. 16세기를 정점으로 스페인에서만 최대 2천 명, 유럽 전역에서 약 50만 명이 희생되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기후학이나 약학의 얕은 지식 정도겠지만, 교회 바깥에서 일반인들이 과학적 지식을 논하는 것은 이단이자 금기였다.
하지만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변화를 멈출 수는 없었다. 풍선 바깥으로 자유롭게 퍼져 나가버린 공기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엔트로피 법칙은 꼭 자연계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1517년에는 마르틴 루터가 교황과 가톨릭의 행태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독일 비텐베르크의 슐로스 교회는 그가 소위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장소다. 내부에 루터의 무덤도 있는 교회는 종교전쟁 이후 복원된 건물이지만, 죽음을 불사한 과감한 행동으로 비합리성을 거부했던 진정한 르네상스형 인간을 만나볼 수 있는 장소다.
1543년에는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의 가르침을 뒤집는 지동설을 내놨고, 1548년에는 더 나아가 무한우주론을 주장한 이탈리아 자연철학자, 브루노가 세상에 나왔다.
이탈리아 로마의 나보나 광장 남쪽에 캄포 데 피오리(꽃의 광장)라는 시장 겸 광장이 있다. 요샌 관광객들 상대로 농산품을 파는 광장 한가운데 망토를 둘러쓰고 음울한 표정으로 세상을 굽어보는 브루노의 동상이 있다. (1899년 빅토르 위고 등이 주창하여 프리메이슨 조각가가 세웠다) 1600년, 그가 화형당한 자리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자신만이 옳다는 맹목적이고 독단적인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비판하였다. 끝도 없고 중심도 없는 우주에서 고정불변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의심하고, 삼라만상 모두에 신의 섭리가 녹아있다고 주장했다. 요즘 시대에나 어울릴법한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생각은 곧 다가올 근대적 정신의 신호탄이었다.
여기까지가 헨리 8세 재위 기간을 전후로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이었다. 스페인의 운명을 바꾼 1492년 보다 1년 먼저 태어나 유럽에서 이어진 혼란의 한가운데서 재위기간을 보낸 그는 선택이 필요했다.
사진7-36 : By daryl_mitchell from Saskatoon, Saskatchewan, Canada - Giordano Bruno Statue, CC BY-SA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0681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