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런던~에딘버러편-3)
템플처치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또 한 명 있다.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다.
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누구나 다 아는 런던의 유명한 랜드마크다. 런던을 여행할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세인트폴 성당이 바로 그곳이다.
로마의 성 배드로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돔을 가진 성당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다. 돔 아래에는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 공작과 넬슨 제독의 무덤이 있다. 지난 2000년,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템즈강 맞은편 발전소 건물을 개조한 테이트모던 미술관과 밀레니엄 브릿지로 연결되면서 런던의 새로운 명소로도 주목받는 곳이다. 이 성당을 설계한 크리스토퍼 렌은 예전 영국 최고액권 50파운드 지폐에 세인트폴 성당과 함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그가 성당의 설계를 맡게 된 건 런던을 덮친 뜻밖의 대참사와 관련 있다.
런던이란 도시는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줄여서 ‘the City’)을 중심으로 32개 자치구를 합쳐 부르는 광역의 개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인 런던은 정확히 여의도 면적(2.9㎢)과 일치하는 시티 오브 런던 지역만을 지칭한다.
시티 오브 런던은 과거 로마제국 지배의 흔적이다. 로마군대가 이곳에 성벽을 두르고 건설한 론디니움(Londinium)이라는 병영요새가 기원이다. 그 영역은 동쪽끝 지금의 런던탑부터 서쪽끝 세인트폴 성당이 있던 곳까지였고, 중앙의 포럼 광장은 현재 리든홀마켓(Leadenhall Market) 자리에 있었다. 통상적인 로마의 도시계획에 비춰볼 때, 포럼 근처엔 비너스 신전, 세인트폴 성당이 있는 언덕에는 주피터 신전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지만 확인된 게 없다. 런던대화재 때문이다.
1666년 9월 2일 자정 무렵, 런던탑 근처 푸딩레인에 있는 빵집에서 불이 났다. 금방 잡힐 거라는 정부 당국자의 낙관과는 달리 불은 마침 불어온 동풍을 타고 성벽 안을 초토화했고 성벽 너머로 빠르게 번졌다. 4일 후 불은 가까스로 잡혔지만 약 7만 명의 이재민을 남겼고 런던의 5분의 4는 잿더미가 되었다. 당시의 런던을 상징하던 세인트폴 성당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런던을 리뉴얼할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런던은 인구가 몰렸지만 하수구가 없어 분뇨가 길바닥을 뒤덮었고 공장은 주택과 섞여 매연이 지독했다. 비위생적인 환경 탓에 일 년 전부터 흑사병이 창궐하며 주민의 20%가 죽었을 정도로 도시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터였다.
로열 소사이어티(Royal Society)가 가장 재빠르게 움직였다.
왕립 자연과학학회로 의역되는 이 단체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추종하는 자연과학자들의 모임에서 출발했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처럼 명제 간에 관계를 보여주는 형식적 논리학 대신, 관찰과 조사를 통해 명제 하나하나의 진실성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진실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니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었다.
베이컨의 말처럼 ‘아는 것이 힘’이 된 영국은 이때부터 과학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룬다. 1660년 창립된 로열 소사이어티는 시발점이었다. 회원은 보일-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보일이나 아이작 뉴튼, 최근의 스티븐 호킹까지 쟁쟁한 스타들을 아우른다.
창립 멤버이자 후에 제3대 회장이 되는 크리스토퍼 렌과 그의 동료, 존 이블린(John Evelyn)은 즉각 런던대개조 계획을 내놓는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직선으로 펴고 도시를 블록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각자 내놓은 계획안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한눈에 봐도 압도적인 팔각형 광장과 이들을 잇기 위해 사선으로 뻗은 도로 때문이다. (닮은 이유는 특별한 이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소개할 예정이다)
이 대담한 계획은 여러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우선 땅주인들의 반발이 거셌고, 왕도 이를 통제할 만한 경제력과 정치력이 없었다. 때문에 런던은 금세 다시 예전의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로 돌아갔다. (대신에 계획안의 주요 컨셉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실현된다. 바로 미국의 워싱턴 DC다! 다음 장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러나 화재로 불타버린 개별 건축물을 재건하는 과정에 최대 수혜자는 단연코 크리스토퍼 렌이었다.
그는 무려 50개가 넘는 교회를 재건했다. 그중 대표작이 세인트폴 성당이다. 초기 설계안은 양팔의 길이가 같은 그릭 십자가 형태였다. 대놓고 중앙집중식 성당을 표방한 것이다. 그런데 평면도를 보면 그냥 단순한 그릭십자가가 아니다. 꼭지점들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것이 크로아 파테를 꼭 빼닮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십자가가 교차하는 중심부를 여덟 개의 기둥이 팔각형을 이루며 감싸고 있다. 이쯤되면 무척이나 낯익다. 맞다. 이건 예루살렘의 바위위의 돔 사원이다. 우연의 일치? 아니다.
실제 크리스토퍼 렌은 런던대화재로 소실된 시티 오브 런던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만들고자 했다. 서쪽에 위치한 템플처치가 성묘성당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쪽의 높은 언덕 위 세인트폴 성당은 템플마운트와 바위위의 돔 사원으로 삼고자 했다.
곧바로 사제들의 불만이 이어졌다. 당연하다. 중앙집중식 평면은 가톨릭과 교리가 유사한 성공회에서도 미사를 위한 용도로는 부적절했다. 할 수 없이 설계를 변경했다. 그래서 신도석을 길게 빼 라틴십자가를 만들었다. 원래 계획에 차질을 빚었지만, 크리스토퍼 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단 8개의 기둥으로 된 중앙제단은 그대로 살렸다. 그리고 이 성당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기어이 표현하고 만다. 어떻게?
성당의 긴 축을 약 800미터 떨어진 템플처치의 축과 일치시킨 것이다. 마치 두 개의 건축물이 한 몸뚱이인 것처럼! 이때문에 원래 동서축에 놓여야 할 세인트폴 성당을 남서쪽으로 미묘하게 틀기까지 했다. 지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템플처치에 대한 크리스토퍼 렌의 관심은 남달랐다. 단순한 호기심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첫 번째 결혼식을 템플처치에서 올렸고, 템플처치의 최대 경제적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템플처치의 내부 구조와 장식에도 손을 많이 댔다. 1941년 나치의 폭격으로 상당 부분 망가졌지만, 그가 만든 목조 제단이나 기둥같은 부재가 종전 후 박물관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면서 다시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교회 내부는 완벽하게 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가지! 템플지구는 남쪽으로는 템즈강을 경계로 삼고, 나머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였다고 했는데, 외부로 연결된 유일한 출입구가 플리트 스트리트에 면해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처음 템플처치를 찾아 헤맬 때 들어왔던 바로 그곳이었다(<제47화> 참조). 골목길 위에 건물이 세워져 의아했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린 셈이다. 오래전 없어져 버린 성문을 대신할 그 건축물 역시 크리스토퍼 렌이 설계했다.
템플처치와 템플지구에 대한 크리스토퍼 렌의 각별한 관심을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프리메이슨이기 때문이다. 그의 설계안이 프리메이슨의 관념을 얼마만큼 반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인트폴 성당을 보고 있자니 적어도 건축학적 측면에서 팔각형을 다루는 솜씨나 템플처치를 런던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다루려는 그의 의도에서 프리메이슨 배후에 어른거리는 템플기사단이 느껴진다.
템플처치와 프리메이슨 사이를 연결하는 단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템플기사의 피를 가진 현재의 영국 왕실이다.
템플기사단의 런던 지부가 템플지구로 이사하기 전에는 윗동네, 홀본(Holborn) 지구에 있었다. 지금 하이홀본 스트리트 아래 사우샘프턴 빌딩스(Southampton Buildings)라는 골목길 주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까운 거리에 18세기부터 자리잡은 런던 프리메이슨 본부(프리메이슨 홀)도 있다. 매년 두 번 런던패션위크가 열리는 이 건축물에는 일반인의 방문이 가능하다. 뮤지컬 극장이 밀집한 웨스트엔드 지역에 1717년 세워진 프리메이슨 홀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내부는 반복적으로 사용된 기하학적인 패턴에 화려한 색채를 더해 깔끔하고 고급진 느낌을 준다. 개중에는 크로아 파테처럼 보이는 십자가 또는 꼭지점을 이으면 팔각형이 되는 문양들이 육각형의 다윗의 별과 섞여 있다. 가이드투어를 신청하면 도서관이나 집회홀 등을 조금 자세히 둘러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역대 그랜드마스터의 초상이나 관련 자료들도 볼 수 있는데, 놀라지 마시라! 그 초상화들 중엔 지금의 윈저 왕조 전신인 하노버 왕조의 조지4세(엘리자베스 2세의 5대조 큰할아버지뻘되는)의 것도 있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도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의 그랜드마스터로 이름을 올렸다. 영화 <킹스스피치>로 널리 알려진 말더듬이 왕이다. 이렇듯 영국 왕실은 프리메이슨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참고로, 조지 4세부터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는 역대 여덟 명의 영국 왕 중에서 조지 5세와 여왕 2명(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 모두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은 여성의 입단을 허용하지 않고, 조지 5세는 차남으로 왕위계승 가능성이 없었으나 형인 빅터 왕세자가 급사하면서 갑자기 왕이 됐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하노버 왕조의 모든 영국 왕들이 프리메이슨이었던 것이다.(빅터 왕세자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그래서일까? 영국 왕실이 템플처치에 보여준 애정은 각별하다.
템플기사단은 런던이 영국의 수도가 되면서 시티 오브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종교중심지)과 웨스트민스터(왕권중심지) 사이에 위치한 지금의 노른자위 땅(템플지구)을 새로운 지부가 위치할 자리로 낙점받았다. 1185년 축성식에 헨리 2세까지 참석했고, 존 왕 시절에는 이곳을 왕실 금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수립하면서 영국 전역의 수도원과 성당을 강제로 폐쇄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템플처치는 살생부에서 제외된다. 가까이는 1958년 전쟁 피해로부터 복구가 완료되고 재개관하던 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규모는 작지만 템플처치가 갖는 위상이 대단하다는 반증이다.
템플처치는 현재 성공회 교구나 관구에 소속되지 않는 국왕 직속의 성당이다. 국왕 직속 성당의 대부분이 윈저궁 같이 국왕 소유의 궁전이나 런던탑의 내부 채플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 독립된 조그만 건축물은 굉장히 특별한 대우를 받는 셈이다. 스튜어트 왕조 이전에는 충실한 신하이자, 스튜어트 왕조 이후에는 왕실의 혈통이 된 템플기사 윌리엄 마샬이 잠들어 있어서일까?
이제부터 템플처치를 떠나 템플기사단 해체 후 비밀스런 입문의 길 마지막 성소이자 프리메이슨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성당까지 영국여행을 시작한다.
(50화에서 계속, 글이 괜찮았다면 '구독하기'와 '좋아요'를 꾹~눌러주세요~!)
*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7-24 : By P.Cikovac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7138809
사진7-27우 : https://alanherriot.co.uk/freemasons-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