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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Jun 14. 2023

요정과 유령이 등장할 법한
영국의 밤

50/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런던~에딘버러편-4)

   영국의 밤은 어둡다. 


   밤이 어두운 거야 당연하지만, 대낮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환한 가로등에 익숙한 내게 깜깜한 밤은 오히려 낯설다. 심지어 어느 도시건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면 여기 사람이 살기는 하나 싶을 정도다. 해 질 녘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고 거리엔 행인들조차 뜸해진다. 띄엄띄엄 가로등이 있긴 하지만, 장애물 정도만 식별 가능한 최소한의 밝기다. 


   길옆 저층의 타운하우스에선 여간해서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다. 영국인들이 워낙 조용한 데다 요새 고령화의 여파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암막커튼을 쳐서 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서다. 영국인들이 암막커튼을 왜 이리 좋아하는지는 여름에 분명해진다. 오후 11시가 넘도록 해가 지지 않으니 말이다. 


   하나 더 특이한 게 있다. 영국인들은 백색광보다는 황색광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백색 형광등에 익숙한 나는 처음 렌트한 집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동네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한 철물점에서 별도 주문을 하고서야 겨우 백색광 전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하니 황색광이 암막커튼 틈새로 새어 나간들 밖에서 볼 땐 어둡기 매한가지다. 이런 분위기에선 황색광으로 선명해진 자신의 그림자와 숨바꼭질하는 피터팬이나, 해리포터를 찾아 호그와트에서 온 흰 올빼미 헤드위그가 런던의 밤하늘에 등장한대도 하등 어색할 게 없을 듯하다.      


   오후 3시 30분 무렵부터 어둑해져서 더욱더 으스스해지는 겨울에도 유독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10월 마지막 날 할로윈데이다. 


   처녀를 인신공양하던 고대 켈트 종교, 드루이드교의 의식이 변형된 것으로 분장한 아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간제물 대신 사탕을 얻는다. 사탕이 없으면 쓰레기 투척 등 귀여운 해꼬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 미리 마트라도 다녀와야 한다. 켈트나 로마 시대에는 11월부터 새해였으므로 10월 31일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이날 사람들은 액운을 쫓아내려고 호박 속을 파내고 밤새 등불을 밝히는 잭오랜턴(Jack o’lantern)을 만들어둔다. 우리도 섣달그믐에 야광귀가 신발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밤새 구멍이 촘촘한 체를 집 바깥에 걸어두었으니, 시공간을 관통해 공유되는 문화가 신기할 따름이다.


   할로윈을 기점으로 영국인들의 밤마실은 1주일간 계속된다. 그리고 11월 5일 절정에 다다르는데, 주민들은 마을 공원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화려한 불꽃놀이에 폭죽까지 시끄럽게 터뜨린다. 이날은 본파이어 나잇(Bonfire night) 혹은 가이포크스 데이라고 불린다. 


   가이포크스가 누군지 몰라도,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주인공이 쓰는 가면은 대부분 안다. 그게 가이포크스 마스크다. 조롱하는 듯한 입꼬리 뒤에 뭔가 소름 돋게 만드는 차가운 웃음의 가면은 국제해커그룹 어나니머스나 집회 현장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곧잘 사용된다. 


   사건의 발단은 성공회를 장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가 튜더 왕조의 문을 닫고, 가톨릭 세가 큰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가 잉글랜드 왕위까지 계승하며 시작된다. 궁지에 몰린 가톨릭교도들은 영국 왕이 된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국교를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릴 거라 믿었다. 


   하지만 뜨뜻미지근한 왕의 태도에 조바심 난 일단의 무리가 1605년 국왕 암살계획을 세우고 당시 왕궁(지금의 국회의사당) 지하실에 폭탄을 설치한다. 성공하는 듯 보였던 거사는 누군가의 밀고로 실패했고, 지하실에서 폭탄을 지키던 가이포크스가 제일 먼저 체포되어 앞서 이야기했던 교수척장분지형의 형벌을 받는다.(<제48화> 참조) 그가 체포된 11월 5일은 이후 가톨릭으로부터 영국을 수호한 날로 시끌벅적하게 기념하게 된다.     


(사진7-28. 좌 : 영화 <브이포벤데타> 속 가이포크스 ©archive.pinupmagazine.org, 우 : Lewes의 본파이트나잇 축제 ©Heather Buckley)

 

   영국의 밤에 빠질 수 없는 게 또 있다. 바로 유령이다. 


   아마 영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령이 출몰하는 나라일 것이다. 지역도 가리지 않는다. 무려 60개가 넘는 도시에 고스트 워킹투어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귀신씌운 장소들은 대부분 기구한 사연을 가졌다. 


   특히 치정사건들이 많다. 1518년 캐슬의 성주와 결혼하기 위해 남편을 교살하고 오븐에 태워버린 악명높은 살인범 아그네스가 교수형을 당한 후 일몰 무렵 캐슬을 배회한다거나(팔레이 헝거포드 캐슬), 같은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자 언니가 지하실에 가둬 굶겨 죽인 아름다운 미모의 동생 마틸다의 유령이 밤새 폐허가 된 성을 방황한다는(베리 포메로이 캐슬) 류의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전쟁도 한몫한다. 1645년 영국 내전 당시 왕당파 청년과 사랑에 빠진 앨리스라는 의회파 가문 여성이 탈출하다가 강에 빠져 죽은 후 폭풍우 치는 밤이면 그들이 갇혔던 성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굿리치 캐슬), 명예혁명으로 추방당한 제임스 2세의 복위를 주장하던 반혁명세력이 포위당해 비참하게 죽어 간 지하감옥에서 습기찬 벽을 혀로 핥는 목마른 유령들도 나온다.(칼라일 캐슬) 


   원귀가 자신이 죽은 장소나 생전 집착했던 것에 들러붙어 바람 불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소리 내는 대나무숲처럼 억울함을 항변하는 듯하다. 당시의 충격적인 역사가 초자연적 전설로 기억되고 전승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면 말고 식이 아닌, 실제 목격담도 심심찮게 전해진다. 대표 유령이 앤 불린(Anne Boleyn)이다.


   그녀는 가톨릭과 절연하면서까지 첫 번째 부인(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했던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천 일 만에 참수된다. 그녀가 죽은 5월 19일 밤이 되면 처형장소인 런던탑(빅토리아 여왕이 처형장소로 추정한 곳을 표시해두었고, 요샌 거기에 추모비도 세워놨다)에서 자신의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는 유령을 봤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진위가 증명되지 않은 흐릿한 사진들도 그럴싸하게 돌아다닌다) 같은 날, 그녀의 생가로 추정되는 노퍽 주 블릭클링 홀에서도 머리없는 마부와 머리없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머리를 무릎에 내려놓은 유령을 태우고 현관에 도착하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제보도 있었다. 


(사진7-29. 런던탑의 앤불린 처형장소 기념비 ©이경석)


   가장 최근에 CCTV에 찍힌 유령은 런던 남서쪽 햄튼코트 궁전에서 나왔다. 붉은색 외관이 인상적인 유명한 관광지인데, 역시 헨리 8세와 관계가 있다. 앤 불린을 참수한 후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와 살면서 기다리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얻은 곳이다. 하지만 시모어가 산후 12일 만에 숨지자 네 번째 부인(클레브의 앤, 이혼)과 다섯 번째 부인(캐서린 하워드, 역시 런던탑에서 참수형), 마지막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다행히 헨리 8세가 먼저 죽었다)와 차례로 결혼한 장소이기도 하다. 


(사진7-30. 2003년 12월 밤, 햄튼코트 궁전 CCTV에 찍힌 유령 ©Hampton Court Palace via AP)


   헨리 8세가 죽은 뒤에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사이에서 낳은 딸 메리가 요절한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궁전의 주인이 된다.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 불릴 만큼 메리 여왕은 가톨릭으로 복귀하며 성공회 성직자 283명을 처형대로 보냈으니, 이곳에 한 많은 유령들이 나오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영국 사극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 헨리 8세는 대체 누구이며, 그의 시대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사진7-31. 런던 외곽의 햄튼코트 궁전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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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7-28좌 : https://archive.pinupmagazine.org/articles/article-guy-fawkes-mask-v-for-vendetta

사진7-28우 : By Heather Buckley, http://heatherbuckley.co.uk/ - https://www.flickr.com/photos/heatherbuckley/5151728225/,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99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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