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에서 동해안으로 나와 사이먼&가펑클이 노래한 스카버러(Scarborough)를 거쳐 롤러코스터같은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 속 배경이 된 휘트비(Whitby)가 나온다.
에스크 강 하구에 자리한 도시는 강에 의해 동서로 양분된다. 서쪽이 해변과 기차역을 포함한 신시가지이고, 동쪽이 구도심이다. 그런데 구도심은 지형부터 범상치 않다. 높은 언덕이 강을 따라 솟아있는데, 언덕의 가장자리는 경사가 급해 거의 절벽에 가깝다. 도시는 절벽과 강 사이 옹색한 저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빨간 지붕을 인 집들이 푸른 언덕을 병풍 삼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만들어내는 풍경은 지중해 어디쯤으로 보일 만큼 영국에선 이국적이다.
지금은 쇠락한 항구지만, 한창일 때는 손꼽히는 조선업의 중심지였다.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을 키울 만큼 북적이던 항구는 이후 포경산업의 거점이 되었다. 고래잡이가 금지되고부턴 고래를 관찰하는 호핑투어가 출발하고 북해의 대구를 잡는 어항이 되었다. 덕분에 여기선 영국 어디보다도 맛있고 신선한 피쉬앤칩스를 맛볼 수 있다.
언덕 아래가 산 자들의 공간이라면, 언덕 위는 죽은 자들이 차지했다. 언덕 위를 지배하는 랜드마크는 단연 휘트비 수도원이다.
7세기 건립되어 숱한 침략을 견뎌왔지만, 헨리 8세를 피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반쯤 허물어진 폐허는 해안가의 세찬 바람과 변덕스런 날씨 덕에 으스스하다. 그래서일까? 소설 <드라큘라> 이전부터 성당에는 유령이 출몰했다. 전설은 수도원의 젊은 수녀, 콘스탄체가 마미온이라는 기사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면서 시작된다. 살얼음판 같았을 그들의 만남은 금세 발각됐고, 수녀는 성당의 벽에 산 채로 갇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후 매년 1월 6일(그 당시엔 이날이 크리스마스였다) 밤이 되면 성당 어디선가 성가대 합창 소리가 새 나온다고 한다. 섬찟하면서도 애달픈 이야기다......라고 하고 싶지만, 여행할 당시 3월임에도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더웠다. 드라큘라도 밖에 나와 일광욕이라도 할 기세였다.
시원한 바다를 보고 싶어 얼른 성당 뒤편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도 내 인생 중 가장 아름다운 묘지를 발견했다. 북해의 푸른 바다가 발아래 출렁이는, 전망대로도 손색없을 공간에서 묘지를 마주할 줄이야......! 글씨를 읽기 힘들 정도로 마모된 비석들이 아무렇게나 서 있고, 그 사이로 산책 나온 주민과 관광객들이 배회하는 광경은 거대한 설치미술을 방불케 한다. 한 명 한 명 파란만장 인생스토리를 수백 년 동안 품어 왔던 대지는 그렇게 현재와 조우하고 있었다. 언제봐도 신기하다. 죽음은 불쾌하고 무섭고 가급적 멀리해야 한다고 믿으며 구석진 곳에 애써 모른 척 숨기는 데 익숙해진 나로선 말이다.
유럽에 처음 와서 도시 한복판, 사람들이 사는 곳 옆에 버젓이 자리한 묘지는 그래서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꾸만 끌렸다. 그러다가 죽음이란 실체가 마음속에 훅 들어왔다. 그러고 나자 역설적이게도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도대체 네가 무엇이냐고......뭘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그리고 그것이 젠장 무슨 의미냐고......질문이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답을 찾고 싶었다. 지난했다. 한동안 ‘어차피 죽을 텐데’하는 극한의 허무함에 좌절하다가도, ‘한 번 사는 건데’하는 삶의 의지가 변덕스럽게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그 말이 그 말이다!) 혼란스런 마음만큼이나 막막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종교에 위로를 청하고, 책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여행을 하며 다양한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금껏 참 많은 시간을 나에 대해 묻고 사색하며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세상 모든 지식과 경험을 섭렵할 수는 없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그때나 지금이나 답을 찾진 못했다. 아마 평생 못 찾을 것이다. 설령 섭렵한들 거기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답이란 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돌이켜보건대, 답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한 부단한 여정이 인생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싶다. 황금을 숨겼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밭을 열심히 파헤쳐 풍년이 들었다는 옛이야기처럼 말이다.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내 삶의 색깔과 모양이 달라졌다. 가장 나답게 살아가는 방식과 행복한 삶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았다. 여기에 기회비용은 의미 없다. 고민과 방황에 헤매고 실수하고 잠시 다른 길로 가더라도 그것조차 나의 일부니까.
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지금의 나는 여전히 그 여정 위에 서 있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묵묵히 한 걸음씩 걸어갈 뿐이다. 이제는 삶의 허무함을 잊기 위해 욕심만 불러일으키는 목표를 정하고 그걸 이루지 못하면 곧 세상이 무너질 듯 행동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나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내 존재감을 강압적으로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씩 그 마음이 흔들릴 때, 다시 죽음을 찾아 겸손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정작 내가 저 무덤에 들어갈 때가 오면 그런 내 인생을 대견해하며 희미하게 미소 하나만 남기고 싶다.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가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런 이유로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면 광장, 시장과 함께 묘지를 찾는 버릇이 생겼다. 햇볕과 바람이 쏟아지는 언덕을 묘지에 내준 휘트비 사람들은 오늘도 죽음을 올려다보며 살아간다. 그리고 저승과 이승 사이에 가로놓인 스틱스 강이라도 건너듯, 해 질 녘 언덕으로 이어진 199개 계단을 올라 망자들과 함께 바다 너머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한다.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저 건너의 세계이지만, 삶을 사유할 수 있는 힘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죽음이란 존재로부터 나온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실제로는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드라큘라>가 당시 과학만능주의에 가한 일침이었다. ‘죽음’만큼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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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