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서 여느 고3처럼 지옥의 레이스를 질주할 때, <인디아나 존스>의 세 번째 시리즈가 개봉됐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모의고사를 끝내자마자 무서운 사감 선생님을 따돌리고 영화관으로 내달렸다. 여전히 재미있는 웰메이드 오락영화였지만, 거기서 처음으로 템플기사를 만났다. 그가 칠백 년 동안 지킨 성배에 대해서도, 그걸 왜 템플기사가 지켜야 했는지도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런 건 학력고사에 나오지 않는다.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자연스레 독립했다. 시간과 장소의 구속이 사라지자, 딴생각들이 자라났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걸 해보고 싶었다. 일단, 교실과 도서관에서 멀리 떨어졌다. 다시 거기로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못 나올 것 같았다. 찬란한 20대를 활자에 갇혀 보내고 싶지 않았다. 대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을 만나고, 공연도 하고, 미술관 일도 도왔다. 즐거웠다. 가끔 서울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큰 낙이었다. 서울은 내가 자라온 환경과 너무나 달랐다. 모든 게 신기했다. 알면 알수록 미지의 영역이 넓어지는 아이러니가 세상의 이치라 했던가? 그러다 문득, 죽을 때까지 이 넓은 세상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교내에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다. ‘배낭하나 달랑메고 가자, 세계로!’ 처음 본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그 후로 상사병에 걸린 놈처럼 앓았다. 즉시 짬을 내어 알바를 시작했다. 2년 후 270만 원이 손에 쥐어졌다.
1992년 6월. 드디어 KLM 항공기에서 담배를 피우며(그땐 비행기에도 흡연석이 있었다!) 생애 첫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두 달간 서유럽말고도 너무 가고 싶었던 이집트와 그리스, 터키를 무턱대고 계획에 추가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거칠 게 없었다. 서유럽 말고는 가이드북도 없었고, 인터넷 서비스는 상상도 못할 때였다. 항공권과 유레일패스를 사고 남은 150만 원이 생활비였다. 턱없이 부족했다. 일주일에 여섯 번은 야간열차에서 새우잠을 자고, 기다란 바게트 하나로 삼시세끼를 해결했다. 어쩔 수 없었다. 처절했다. 종일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 다니느라 땀은 소금이 되어 옷에서 먼지처럼 일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도시 구석구석을 헤매다보니 뜻깊은 인연도 만들어지고, 가끔 뜻밖의 장소도 발견하는 행운은 덤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아래 플라카 지구 문 닫힌 여행사 창에 붙어있던 그 포스터가 눈에 띈 것도. 영화를 본 지 3년도 더 지났지만, 템플기사가 성배를 지키던 영화 속 최후의 성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곳이 세트장이 아닌, 실재하는 유적이라니! 잊고 있던 호기심이 스멀스멀 머릿속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전율이 일었다. 정신 차리고 다시 본 포스터 상단에는 ‘웰컴 투 요르단’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그래, 다음 배낭여행은 바로 저기, 요르단으로 가는 거야!
그 영화 속 성전은 ‘페트라’다. 최근 신(新) 세계 7개 불가사의에 뽑힐 정도로 유명해져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엔 페트라는커녕 요르단 자체가 흔한 여행지는 아니었다. 첫 배낭여행을 마치고 군 제대 후, 나는 두 번째 배낭여행을 떠났다. 설렘을 가득 안고 나는 기어이 요르단 가는 길에 서 있었다.
좌충우돌 요르단 국경넘기
하지만 설렘은 아주 잠깐이었다.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설 땐 거의 언제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곤 했다. 크고 작은 사고의 가능성이 높았고, 그래서 긴장이 엄습했다. 일종의 통과의례다. 요르단도 순탄치 않았다. 가뜩이나 정보도 없는 판에 문제는 비자였다. 대한민국엔 요르단 대사관이 없었다. 우리나라와 요르단은 1962년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요르단 대사관이 서울에 생긴 것은 2010년이 되어서다. 대한민국 여권이면 전 세계 130여 국가를 무비자로 간다지만, 요르단은 예나 지금이나 비자를 받아야 하는 나라다. 하지만 다행히 도착비자가 가능하다. 공항이나 육로로 입국할 때 돈만 내면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가는 육로를 택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국경검문소는 당시 세 곳이었다. 그중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킹후세인 브릿지’(이스라엘에서는 ‘알렌비 브릿지’)였다. 나머지 두 곳은 예루살렘에서 10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텔아비브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돌렸다.
“저기, 알렌비 다리에서도 요르단 도착비자를 받을 수 있나요?”
“물론이죠!”
수화기 건너 직원은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너무나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르단 가는 날, 같은 호스텔에 묵었던 일본 배낭객과 비용을 반씩 나누기로 하고 합승택시 쉐루트를 탔다. 국경까지 40분, 택시비가 하룻밤 숙박비보다 더 비싸다. (팔레스타인에 자리한 국경검문소까지 가는 버스가 당시엔 없었다) 이스라엘측 출국사무소에 도착해 비싼 출국세를 내고, 국경을 넘는 전용버스를 갈아탔다. (국경은 도보로 건널 수 없으니 강제다. 10분도 안 걸리지만, 버스비도 하루 숙박비 수준이다) 국경 넘어 요르단 입국사무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나만 내리란다. 여기선 도착비자를 줄 수 없단다. 다시 돌아가란다. 빡쳤다.
당황할 틈도 없이, 군인들이 나를 버스에 구겨넣었다. 물론 버스비는 다시 지불하고 출국세도 날렸으며 이스라엘 입국심사도 받아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10박을 할 수 있는 거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돈보다도, 문제는 시간이었다. 예루살렘까지 또 택시를 타야 한다. 아무도 국경을 넘지 않는 시간, 합승객을 구할 수도 없다. 그래, 어차피 택시를 타야한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느니 다른 국경검문소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북쪽의 쉐이크 후세인 국경까지 1시간 30분. 택시비는 흥정해서 80달러. 울고 싶었다. 새로운 검문소에서 출국세를 재차 내고(그나마 아까 출국세의 반값이다) 조마조마 국경을 넘었다. 다행히 도착비자와 함께 입국을 허락받았다. 슈크란!
검문소를 나오니 버스가 기다린다. 3시간여 걸려 해가 막 떨어진 요르단 수도, 암만에 들어섰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니 휑하다. 시내 터미널이 아니라 어딘지도 모를 변두리다. 난감했다. 택시 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아침에 일본인 친구가 적어준 숙소 이름을 내밀자 한 기사가 자신의 택시를 타란다. 가격을 흥정하려니, 미터기를 보여준다. 기본요금 1.5디나르에 킬로미터 당 1디나르. 흠, 물가가 만만치 않네! (살짝 의심스럽긴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이야 곧바로 스마트폰 꺼냈겠지만!) 그런데 이건 미터기가 아니라 스톱워치다. 뭘 처먹었는지 빛의 속도로 숫자를 뿜어댄다. 수중에 가진 현금이 부족하다 하니 환전소까지 친절하게(?) 들른다. 환전하는 동안에도 미터기를 멈추지 않아 항의했더니 기사가 1디나르를 선심 써준다. 결국 우리 돈으로 2만원 가량 지불했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근처 조그만 구멍가게를 찾았다. 생수 가격이 너무 비싸 물어보니 가격 단위가 ‘디나르’가 아니라 ‘필스’란다. 1디나르는 1,000필스. 혹시? 했는데 택시도 똑같단다. 택시 기본요금이 미터기에는 150으로 표시되지만, 이게 0.15디나르였단다! 그렇다면......원래 택시비는 2,000원이었던 거다! 오늘 새벽 이스라엘부터 돈 쓰며 삽질하고 다닌 게 여기까지 소문난 게 분명했다. 너무 허탈해서 괜히 헛웃음만 나왔다.
나는 그날 중동을 배회하던 한 마리 어린 ‘호갱’이었다.
연타로 맞은 금전적 손실은 한정된 금액으로 장기간 생활해야 하는 가난한 배낭족에게 치명적이다. 하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준비를 제대로 해오지 않은 대가다. 되돌릴 수 없을 땐 빨리 잊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이 편해진다. ‘노 프라블럼(No Problem)!’ 배낭여행을 하며 제일 많이 내뱉은 이 주문 하나면 어떤 나쁜 상황도 즉각 효력이 중지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실제 그 몹쓸 택시 기사 말고는 요르단에서 받은 환대와 친절은 끝이 없었다. 빈방이 없으면 여기저기 연락해 기어이 잠잘 곳을 마련해주는 숙소 주인들. 길을 헤매면 어디선가 하나둘씩 나타나 도와주는 사람들. 머물수록 중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두려움의 상당 부분은 그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뇌피셜 탓이란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에선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할 때 나이를 궁금해하듯, 그들은 상대방의 종교를 알고 싶어한다. 이때, 이슬람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종교가 없다고 하면 대개는 깜짝 놀라는데, 신을 믿지 않는다는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에게 신의 존재는 종교 이전에, 삶의 기저를 이룬다.
그러기에 중동 사람들이 모두 무슬림이라는 것도 착각이다. 무슬림이 다른 종교에 배타적인 외골수처럼 비춰지는 것도 ‘이슬람국가(IS)’ 같은 종교를 빙자한 극단주의 정치세력이나 서구 중심의 대중매체 영향이 크다. 세상 어디나 또라이는 있고, 현실은 헐리우드 영화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최대 적국인 이란에는 바빌론 유수 이래 남겨진 유대인들이 아직도 2만 명 넘게 산다. 박해받고 있냐고? 아니다. 자유롭게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를 드나들며 종교 공동체를 이어왔다. 심지어 이란 대통령은 유대력으로 새해(로시 하샤나)가 되면 히브리어로 된 새해 인사를 남기기도 한다.
또한 16세기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란 사파비 왕조가 이슬람 시아파를 국교로 삼으면서도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보호해줬다. 이스파한에는 당시 세운 반크교회가 남아 있는데, 르네상스풍의 멋진 프레스코화 아래 지금도 예수를 경배하는 미사가 열린다. 이집트는 물론, 내전중인 시리아조차 열 명 중의 한 명은 기독교도이고 도시 곳곳엔 교회가 자리한다. 중동을 여행할수록 상식이라 믿었던 것과 다른 상황에 종종 맞닥뜨리게 되니 내 마음속 편협한 선입견이 부끄러워졌다.
고작 몇십 년 살아오면서 마치 세상 모든 진리를 깨달은 양, 내 눈과 양심에 덕지덕지 아무렇게나 붙여버린 허접한 편견들. 그리고는 그 프레임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이성적이라 자기최면을 걸고 제멋대로 칼춤을 추며 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을까? 돌이켜보면, 대사관 직원이 무심코 던진, 확신에 찬 잘못된 정보 하나로도 나는 소중한 시간과 돈을 속수무책 잃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진짜 무서운 건 선입견이 무턱대고 내뿜는 증오와 혐오다. 하찮게 보여도 그로 인해 누군가는 하릴없이 목숨까지 잃는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서로 총질을 해대는 두 가문이 나온다. 그런데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증오가 다시 증오를 낳으며 관습처럼 일상화된 살인이 선량한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 뿐이다.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과격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의 현실이 겹쳐졌다.
세상을 향해 겸손해지기로 했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을, 그냥 저기에 멀뚱히 서 있는 산을 놓고 온갖 해석으로 산을 난도질하고는 그중 필요한 것만을 수집해가는 우를 범하지 않겠노라 다짐해본다. 그 산이 아름답건 혹은 무섭건 결국 그건 산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내게 준 교훈이다.
(7화에서 계속, 글이 괜찮았다면 '구독하기' 꾹~해주세요~!)
*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요르단 주변 지도, 구글 지도 활용)
[사진출처]
사진2-1. By Abutoum - Own work,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8888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