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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Mar 22. 2023

성배를 찾아, 드디어 페트라

7/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요르단편-2)

   암만에서 버스로 세 시간 반, 도착하자마자 주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내려놓은 후 서둘러 택시를 타고 페트라에 도착했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틀간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한 티켓을 사서 드디어 유적지에 들어섰다. 하지만 입구부터 어마무시한 바위산이 가로막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임도 잠시. 홀연히 길이 나타난다. 높이가 100m 가까이 되는 아찔한 수직 절벽을 양옆에 낀 길의 이름은 시크(Siq). 아랍어로 ‘협곡’이다. 겨우 두세 명이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이 무려 1.2km나 이어진다.     


   지루하지 않냐고? 천만에! 일단 시크에 들어서면 갑자기 딴 세상이 열린다. 계곡의 바람 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면 무거운 긴장감이 주변을 꽉 채운다. 여기에 진한 초콜릿색부터 블링블링한 핑크색까지 다채로운 색깔이 물결치는 사암 절벽을 타고 흐르는 장밋빛 햇살은 황홀경이다. 


   특히 한낮의 시크는 극적인 마술쇼를 보여준다. 내 주위보다 앞에 보이는 바위가 항상 더 빛난다. 길을 안내하듯, 눈앞에 아른거리는 밝은 빛이 시크를 걷는 내내 나를 잡아끈다. 오딧세우스를 유혹하던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면 분명 이랬을 테다. 시간도 잊고, 방향감각도 잃은 채 홀린 듯 숨죽이며 금단의 땅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란!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라도 된 마냥 신났다.


   얼마나 됐을까? 모퉁이를 몇 번 돌자 절벽의 갈라진 틈 너머 신기루처럼 뭔가가 나타난다. 페트라의 중심건물인 ‘알 카즈네’다. 영화에서 템플기사가 성배를 지켰던 마지막 성전! 처음엔 시크 사이로 성전의 실루엣이 살짝 비친다. 협곡은 어둡고, 햇볕을 정면에서 받은 성전은 발갛게 달궈져 반짝인다. 빛의 대비가 극명하다.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다. 가까이 갈수록 눈부심이 가라앉자 베일을 벗듯 우람한 속살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협곡을 빠져나오는 순간, 성전은 눈에 가득 온전하게 완성되고 입에선 외마디 비명이 절로 튀어나온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사진2-3. 왼쪽부터 시크, 시크의 끝에서 드러난 알 카즈네, 절벽에 새겨진 알 카즈네 전경 ©이경석)

   

   지난 2007년 새로 뽑힌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모두 가봤지만, 페트라는 진심 단연 으뜸이다. 웅장한 자연에 최소한의 인공적인 개입만으로 감동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시크같은 붉은색 사암 계곡은 미국의 앤틸롭 캐년처럼 세계 도처에 흔하다. ‘알 카즈네’도 따로 떼놓고 보면 뭐 그리 특별한 게 없다. 높이 43m, 너비 30m의 웅장한 규모와 로마의 건축양식이 돋보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건축물도 아니다. 기둥처럼 보이지만 세운 게 아니라, 사암 절벽을 파고 들어가 새긴 일종의 조각품이다. 그런데 이 둘이 만나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순간, 지구상 유일무이한 특별한 공간이 탄생했다.


   시크가 끝나는 곳 맞은편 절벽에 ‘알 카즈네’를 새긴 건 정말 신의 한 수다. 서향으로 놓인 절벽은 햇볕이 오래 머물다 가는 빛의 놀이터다. 고대인들은 어두운 협곡 안에서 가장 절묘하게 보이는 위치를 골라 살짝 손을 댔을 뿐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빛은 형상으로 바뀌었고, 시크의 신비스런 분위기는 빛을 제대로 머금은 이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향해 곧장 치달았다. 화려한 금붙이나 성화같은 게 없어도, 오로지 빛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성스러움을 불러낸 고대문명의 지혜를, 건축가의 치밀함을 찬양할 지어다!     


   ‘알 카즈네’는 순전히 후세에 붙인 이름이다. ‘보물창고’란 뜻인데, 누군가는 보물을 상상했나 보다. 정면에서 보면 1층이 그리스 신전 양식인데 반해, 2층은 좀 색다르다. 전형적인 삼각형 페디먼트(박공)를 둘로 쪼개고 가운데 항아리 모양의 원통형 구조물을 설치했다. 여기에 솔로몬의 보물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도굴도 있었다. 하지만 보물은 없었다. 그러자 무덤 혹은 종교 신전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됐지만 정확한 용도는 아무도 모른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알 카즈네’ 내부로 들어가본다. 1층 기둥 너머 안쪽에는 방이 하나 있다. 영화는 거기부터 성배를 찾는 네 가지 시험을 차례로 보여준다. 어디까지나 영화적 허구다. 실제로는 어떤 장식도, 그림도, 조각도 없는 밋밋한 공간만 덜렁 있어 조금 허무하다. (지금은 그마저도 볼 수 없도록 출입을 막아놨다) 궁금증은 더 커졌지만, 이 방의 비밀은 아마 영구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알 카즈네’가 페트라의 대표 랜드마크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페트라는 이 일대 도시유적 전체를 아우른다. ‘알 카즈네’ 오른쪽으로 계속 이어진 길에는 바위를 파서 만든 다양한 유적들이 등장한다. 로마식 노천극장과 열주대로도 보인다. 


   페트라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수수께끼 같은 민족, 나바테아인들과 관계가 깊다. 베두인족의 선조로 여겨지는 그들은 대상로의 교통 요지인 이곳에서 로마와 동방을 연결한 중개무역으로 번성했다. 그들이 여기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나, 원래 있던 유적에 그들이 나중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그들이 직접 도시를 건설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페트라에는 아시리아부터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 페르시아 양식까지 장기간 다양한 문명을 섭취한 흔적들이 적층되어 나타난다. (10여 년 전 ‘알 카즈네’ 지하에서 또 다른 방이 발견된 적이 있다. 비밀의 방은 아니고, 홍수로 인해 토사에 묻혀버린 구조물의 일부였다. 그때의 홍수가 시크를 만들었으니 페트라의 기원이 어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진2-4. 페트라 도시유적 ©이경석)


   로마시대를 끝으로 페트라는 황폐화됐다. 지진과 무슬림의 침입도 있었지만, 결정타는 나바테아인이 독점하던 ‘향신료 로드(The Incense route)’의 변경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라비아반도 남단과 네게브 사막을 잇는 2,500km의 육로 루트가 홍해 바닷길로 바뀐 것이다. 쓸모가 없어진 페트라는 버려졌다. 


   그러다 1812년, 스위스 탐험가인 부르크하르트가 여행 도중 주변에 잊혀진 도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재발견했다. 이후 그의 여행기가 출간되면서 페트라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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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요르단 주변 지도, 구글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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