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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Mar 20. 2023

템플기사단이 숨겨둔 성묘교회를 찾아서

5/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이스라엘편-5)

   원형과 직사각형은 인류가 건축을 시작한 이래 가장 원초적인 조형 틀이었다. 동시에 쓰임새와 미적 감흥이 완전히 다른 양 극단의 가치를 보여준다.      


   먼저, 원형은 본질적으로 강한 중심성을 잉태한다. 하나의 중심을 향한 구심력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묘교회에서 보듯,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성한 장소를 기억하기에 적합하다. 


   더 나아가, 원형은 평범한 대지를 특별한 장소로 바꾸기도 한다. 스톤헨지(Stone Henge)가 대표적이다. 사방 지평선만 보이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원에 돌로 된 2개의 동심원은 한눈에도 장관이다. 원의 중심은 비어있지만, 그곳에 서면 세상이 나를 향해 사열한다는 착각마저 든다. (평소에는 유적에서 꽤 떨어져 관람해야 하지만, 동틀 무렵 직접 스톤헨지 안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소 석 달 전 예약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비싼 입장료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가 되면 바윗돌의 긴 그림자가 원의 중심을 가리키도록 하늘의 움직임까지 담았으니, 태양의 기운을 받는다며 지금도 중심에 끌리는 사람들이 전혀 놀랍지 않다. 이제는 할로윈으로 변형되었지만, 태양신을 믿는 고대 드루이드교의 인신공양 의식의 무대였단 사실도 제대로 실감난다.       


(사진1-16. 좌: 스톤헨지 내부, 우: 하지에 일출 방향을 가르키는 키스톤 ©이경석)


   원형의 힘은 땅에 박힌 기둥 하나만으로도 간단하게 발현된다. 그건 그냥 본능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거리의 예술가 주위에 구경꾼들이 동그랗게 모이는 것과 유사하다. 시각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을 우리의 뇌가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인식하려는 게슈탈트 이론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기능적 요구건, 심리적 이유건 중심을 만드는 기둥은 그래서 특별하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말처럼 기둥 하나가 땅에 생명을 던지고 다른 장소와 대비되는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1-17. 거리의 예술가 주변에 모인 사람들, 좌 : 벨기에 겐트, 우 : 영국 런던 ©이경석)


   가령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성역에 있던 옴파로스가 그러하다. 제우스가 올림푸스 산에서 동서 방향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만난 곳에 세워진 돌은 세상의 배꼽(중심)이었다. 그곳은 곧 가장 영험한 신탁을 받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둥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며 종교적 신성함마저 획득한다.


(사진1-18.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성역과 옴파로스 ©이경석)


   기둥은 때로 우뚝 솟은 형태 때문에 남성 성기의 메타포가 되어 그 신성함과 결합한다. 그건 음란함이 아니라 ‘부활’을 증거한다. 인도 힌두교 사원의 깊숙한 성소에는 돌로 된 기둥이 자리한다. 시바 신의 남근을 형상화한 ‘링가’다. (‘링감’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고위 공무원이나 나이 든 남자를 가리키는 ‘영감’의 어원이 된다) 힌두교의 삼위일체 신은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 시바(파괴)인데, 왜 하필 시바였을까? 파괴 뒤에 창조가 찾아오는 윤회의 세계관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성적 능력을 가진 시바의 남근은 죽음과 생명의 순환 그 자체를 나타내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신전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역시 마찬가지다. 이집트 신화에서 저승의 신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에 의해 살해된다. 시체는 열네 조각으로 토막내져 이집트 각지에 버려졌고,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뒤늦게 조각을 모으지만 나일강의 물고기가 먹어버린 한 조각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에서 잡은 생선은 먹지 않는다) 잃어버린 조각은 남근이었다. 이시스는 밀랍으로 남근을 세우고 시체를 완성한 뒤 오시리스를 부활시켜 호루스를 낳는다. 오시리스는 죽음에서 부활의 신으로 거듭났고, 오벨리스크로 형상화된 그의 남근은 부활의 아이콘이 된다. 


(사진1-19. 좌: 이집트 룩소르신전의 오벨리스크, 우: 룩소르 신전에 새겨진 오시리스 부활 신화 ©이경석)


   그래서일까? 중세 이전에 원형을 모티브로 한 건축물은 그리 많지도 않지만, 대부분은 무덤이나 신전이다. 석기시대 몰타의 거석 신전들과 아일랜드의 보인유적, 로마의 판테온과 베스타 신전, 레바논 바알벡의 비너스 신전 등이 그렇다. 그만큼 원형이라는 형태에 내재된 상징성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부담이었다.           


(사진1-20. 좌: 아일랜드 선사시대 보인유적지, 우: 로마의 판테온 ©이경석)


   그렇다면 직사각형은 어떤가? 원형과 달리 종교적 건축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널리 사용된 직사각 형태는 긴 변을 따라 시각적 흐름을 만들며 자연스레 방향성을 가진다. 그런데 이를 다루는 방식이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가 극명하게 달랐다. 그리스가 외관에 집중했다면, 이집트는 내부공간에 방점을 두었다.      

   그리스의 솜씨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확인 가능하다.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오르는 순간부터 신전에 들어가는 마지막까지 순례자를 위한 완벽한 세트장이다. 


   아테네의 야트막한 야산에 인공성벽을 쌓아 조성한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은 고대 그리스인의 마을 '아고라'에서 시작된다. 오르막길을 잠시 걷다가 저 멀리 볼록 튀어나온 성벽 상부의 작지만 강한 느낌의 니케 신전이 보이면 본격적인 입구 진입이 시작된다. '프로필레이아'라 불리는 기념비적인 입구까지는 곧게 뻗은 계단이 아닌, 옆으로 살짝 물러난 경사로를 오르게 된다. 아크로폴리스의 위용을 스치듯 느릿하게 훑는 동안,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며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대한 열주랑이 인상적인 입구 앞에 섰을 때, 한꺼번에 훅 들어오는 성역의 전경에 그간 눌려있던 감정이 빵 터지고 만다. 


   기둥 사이로 왼쪽에는 정교한 여섯 명의 여신을 기둥으로 삼은 에렉테이온 신전이, 오른쪽에는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에렉테이온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은 단순 우직한 파르테논 신전과 극적으로 대비되는데 구상과 추상의 초현실적 경계 어드메쯤 있는 듯 아련하다. 특히, 입구보다 약간 높이 앉힌 파르테논 신전은 정면이나 측면이 아닌, 가장 훈훈하게 보인다는 ‘얼짱각도’로 틀어져 있다. 덕분에 신전 외벽에 일렬로 늘어선 기둥들이 투시도 효과를 만들며 순례자의 시선과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홀린 듯, 천천히 관조하면서 반바퀴 돌고 나서야 신전의 후면에 숨겨진 성소 입구에 드디어 다다른다. 그야말로 아크로폴리스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게 하고 싶지 않은 건축가의 완벽한 의도가 숨어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기둥으로 둘러싸였는데, 이로 인한 시각적 착시를 교정하는 섬세함도 더해졌다. 엔타시스(배흘림) 기둥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명품 비주얼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스 정부는 유적을 복원하며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의 바닥포장 디자인까지 국제 현상공모를 했을 정도다. 그리스인들의 관심은 온통 드라마틱한 외부공간에 쏠려있었으며, 여기에 건축은 조각과 같은 수준으로 다루어졌다.           

(사진1-21. 아크로폴리스 복원도와 순례자 동선)


(사진1-22. 왼쪽부터 프로필레이아,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 에렉테이온 신전 ©이경석)

 

   고대 이집트 신전에선 정반대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신전은 사막의 더위와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담과 지붕으로 꽁꽁 둘러싸인 탓에 폐쇄적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중왕국 시대 테베, 지금의 룩소르에 건설된 카르낙 신전을 보면 된다. 


   신전은 몇 대에 걸쳐 증축되며 상(上) 이집트의 최고신 '아몬(Amon)'에게 바쳐졌다. ('아멘'과 혼용된다. 가령 투탕카멘의 이름은 본래 ‘투트’인데, ‘투트-앙크-아멘(Tut-ank-amen)’이란 왕의 명칭은 ‘주님(아멘)의 현신인 투트’로 해석된다. 기독교에서 기도 뒤 읊조리는 '아멘'과 동일하다) 신전 입구까지는 스핑크스가 열을 맞춰 안내한다. 거대한 벽으로 된 입구 가운데 작은 틈을 통과하면 완전히 딴판인 세상이다. 먼저 엄청난 굵기의 기둥이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를 주문처럼 두르고 빽빽이 우거진 다주실을 지나가야 한다. 창살을 투과한 정제된 빛은 순례자의 마음까지 정화시켰다. 계속해서 다주실과 일직선상에 배치된 다음 방으로 차례차례 인도된다. 그러면서 점점 방의 크기도 작아지고 천장도 낮아지다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성소와 대면하는 시퀀스다. 방을 거칠 때마다 무거워지는 공간만큼 신분에 따라 접근도 제한되는데, 성소는 왕과 고위 신관의 영역이었다. 


   재미없는 겉보기와 달리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내부구조와 빛의 오묘한 조화가 의외의 반전 매력을 뿜어낸다.     


(사진1-23. 좌: 카르낙 신전 ©https://didemzeynepodemis.wordpress.com, 우: 아비도스 신전 다주실 내부 ©이경석)


   그리스의 조각 같은 외관과 이집트가 숙성시킨 내부공간을 하나로 합친 건 로마였다. 실내는 기능성과 상징성을 갖되, 바깥에서도 이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내외부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었다. 자연스레 군더더기 없이 솔직담백한 구조미가 드러났다. 이런 로마 고유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라면 단연 바실리카다. 


   가장 완성된 형식은 막센티우스 황제가 남긴 것으로 고대 로마의 행정중심지 포로로마노에 있다. '바실리카'는 지금은 성당을 부르는 고유명사지만, 원래는 로마 시대 주민센터 격인 직사각형 집회소 건물을 뜻했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광대한 내부공간과 채광창을 가진 바실리카는 기독교 국가가 된 로마에서 예배당 기능을 담기에도 딱이었다.          


(사진1-24. 로마 포로로마노에 위치한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Wikipedia)


   그러다가 성묘교회에서 바실리카가 예수 무덤과 만난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맞선 보듯, 직사각형과 원형이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앉았다. 교회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질 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시간이 흘러 결국 둘은 하나로 결합한다. 예수 무덤 위에서 제사(미사)를 지낸다는 컨셉의 ‘성당’이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돔이 떠 있는 원형 공간은 천상을 나타내고, 신도들이 모이는 직사각형 공간은 세속을 비유했다.     


   성당은 이후 크게 두 개의 방향으로 진화를 시작한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교리가 흐름을 갈랐다. 예수의 적통을 베드로가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가톨릭은 사제계급을 중시한다. 당연히 천상과 세속의 공간은 성당 안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사제는 천상의 신과 회중석에 일렬로 앉은 신도들을 연결하는 임무를 맡는다. 더 많은 신도들이 앉아야 하니 바실리카가 길어지면서 성당은 라틴십자가 형태가 된다. 


   정교회도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고 예배를 이끌기는 한다. 하지만 신이 신도들 가운데 머무르며 교회 자체가 신의 집이어야 한다는 종교관에 따라 신도와 사제 간의 공간은 구분이 없다. 대신, 이콘(성화)으로 채워진 중앙집중식 공간이 자리잡았다. 십자가가 교차하는 곳에 돔이 하나만 올려진 가톨릭 성당과 달리, 곳곳에 신이 임재한 정교회 성당에는 여러 개의 돔이 올려지는 이유다.             

 

(사진1-25. 좌: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우: 러시아 크레믈린 궁 내부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이경석)


   성묘교회에서 시작된 원형과 직사각형의 물리적 결합이 화학적으로 완성된 사례를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으로 보기도 한다. 건축가는 펜던티브 돔이라는 획기적 공법을 개발해 돔을 반으로 나누고 벌린 다음, 그 위에 다시 돔을 얹는 형식으로 15층 건물 높이(55m)의 기둥 없는 대공간을 만들었다. 직사각형 바실리카 안에 두 개의 원을 품은 셈이다. 16세기 세비야 대성당이 출연하기 전까지 무려 천년 간이나 세계 최대의 건축물이었던 성당은 당시 인간이 구현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성취였다.


   성당은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침략자들이 천년 제국 비잔틴의 전부를 완벽하게 쓸어버렸던 터라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다. 하지만 진짜 비결은 ‘하기야 소피아’가 가진 정교회의 중앙집중식 공간이었다. 신과 인간의 직접 소통을 강조하는, 그래서 사제의 역할이 정교회와 놀랍도록 유사한 이슬람식 예배에도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적대적인 종교라도 신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유사한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1-26. 하기야 소피아 외관과 내부 ©이경석)


   템플기사단이 재구성한 성묘교회는 어땠을까? 그걸 알려면 그들이 가졌던 종교적 관념부터 먼저 알아내야 한다. 그럴수만 있다면, 기사단이 구현했을 그들만의 성묘성당을 어디서건 쉽게 식별해낼 것이다. 나는 그 단서를 의외의 장소, 요르단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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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사진1-24: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6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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