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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Mar 17. 2023

비밀맛집2: 성묘교회, 템플기사단 탄생지

4/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이스라엘편-4)

   템플마운트에서 내려와 천천히 성묘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채 700m도 되지 않는 거리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기독교 구역에 들어서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는데도 어느새 올드시티의 서쪽 끝, 자파게이트에 와버렸다. 엥! 바위위의 돔 사원만큼이나 중요하고 유명한 건축물인데,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리가......하며 오던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갔다. 


   얼마 못 가 길가에 옹색하게 난 아치형 입구에서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혹시? 했는데, 맞았다! 하지만 너무나 좁고 평범한 입구가 이내 의아해졌다. 외관을 둘러본다. 분명 지도상으로는 거대한 규모인데, 주변의 건물들 속에 파묻힌 탓에 명성에 걸맞은 정면이 없다. 게다가 올드시티의 건물들은 황토색 라임스톤을 사용하고 있어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그나마 입구 옆에 있는 5층짜리 종탑이 여기가 교회임을 간신히 말해줄 뿐이었다.              


(사진1-10. 성묘교회의 옹색한 입구, 2층 오른쪽 창문 아래 '움직일 수 없는 사다리도 보인다 © jlascar)


   평면을 보면 더 어지럽다. 얼핏 십자가의 아래쪽을 길게 늘인 라틴십자가처럼도 보이고, 아닌 것도 같다. 잘게 나뉜 작은 예배실들이 무질서하게 연결되어 시각적 혼란이 가중되어서다. 애매하다. 아니, 기독교 최고의 성지치고는 무척 난해하다. 그나마 교회 중심부를 관통하는 두 개의 큰 공간이 없었더라면 아사리판이 됐을 것이다. 그 중심 공간은 원형으로 된 로툰다와 그리스정교회의 대예배당인 직사각형의 카톨리콘이다. 출입구는 이 두 개의 공간 사이, 남쪽 측면에 있다.      


(사진1-11. 성묘교회의 어지러운 평면 © Conrad Schick)


   성묘교회, 글자 그대로 예수의 무덤 위에 자리한 교회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의 무덤뿐만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골고다 언덕을 모두 포괄한다. 사실, 골고다 언덕이 어디인지는 아직 논란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예루살렘은 예수가 살던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기 때문이다. 


   서기 70년 로마에 항거하는 제1차 유대인 반란이 마사다(Masada)에서 집단자결이라는 비극으로 끝나면서 로마군은 헤롯왕이 재건한 솔로몬 성전을 파괴한다. (성전약탈 모습은 로마의 티투스황제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 유대인의 종교나 관습을 이제 인정하지 않겠다는 로마제국의 강경한 방침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나아가, 그 자리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주피터 신전을 세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132년 제2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3년 만에 처참히 진압된다. 이후 로마가 내린 조치는 더더욱 가혹했다. 일단 예루살렘이란 도시 자체를 완전히 없앴다. 그 위에 로마식 도시를 새로 건설하며, 도시 이름조차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꾼다. (아일리아가 하드리아누스의 성이니,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로 명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해버렸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온 건,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제2대 정통 칼리프인 오마르 시대였고, 지배권을 되찾은 것은 1,800년도 더 지난 1948년이었다)     


 (사진1-12. 성묘교회 로툰다 내부에 있는 예수의 무덤 © Jlascar)


   완전히 파괴된 도시에서 골고다의 흔적을 찾아낸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그는 326년부터 2년간 성지순례 차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그리고는 예수가 못 박힌 ‘진짜 십자가’ 조각과 예수가 죽었다 부활한 무덤을 찾아낸다. 아니, 찾았다고 선포한다. 


   그런데 골고다 언덕이라 지목된 곳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비너스 신전 자리.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300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지 2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남아있는 사료도 없고 증언할 유대인들이 모두 죽거나 쫓겨난 상황에서 골고다 언덕을 찾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층 입장에서 필요한 건 사람들을 꼬드길 눈에 보이는 증거였다. 심지어 그 증거가 사실인지 여부조차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건 믿음의 문제로 돌리면 될 테니 말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다고 하나, 그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예수의 가르침과 이야기를 빌리되, 로마의 지배층 입맛에 맞는 신앙과 교리로 다듬어졌다. 당연히 로마인들과 그 속주가 믿었던 기존의 이교도적 신앙의 잔재가 불가피하게 기독교라는 우산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예를 들어, 아기를 안은 어머니 여신을 숭배하는 전통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흔했다. 죽은 오시리스를 부활시켜 낳은 아들, 호루스를 안고 있는 이시스는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로 번안되었다.


(1-13. 이집트 필레 신전 벽화 일부, 아기 호루스를 안고 있는 이시스 여신 ©이경석)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전승은 좀 더 직설적이다. 죽어서 태양신 ‘바알’이 된 남편 니므롯(성경에서 노아의 증손자)은 동정녀(라고 주장하는) 세미라미스를 통해 아들, 담무스로 부활한다. 세미라미스는 담무스가 곧 니므롯이라며 아들과 결혼까지 한다. 이 엽기적 이야기 속에서 부활, 동정녀 숭배, 삼위일체의 오랜 원형이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세미라미스는 자신을 숭배하도록 동정녀로 구성된 사제집단을 만들었고, 숭배를 거부한 신성모독자에게 십자가 형벌을 처음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앗시리아의 여왕, 세미라미스는 미의 여신, 출산의 수호신과 다산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데 지역마다 다른 이름을 갖는다. 바빌론에서는 이슈타르,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그리고 로마에서는 비너스이다. 로마 황제가 건설한 비너스 신전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으로 특정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무튼 헬레나 황후는 그 자리에 두 개의 건축물을 세운다. 먼저, 골고다 언덕을 망라하는 규모로 335년 직사각형 모양의 대성당을, 예수 무덤 자리에는 원형의 부활교회를 340년에 각각 완공한다. 그리고 두 개의 건축물 사이에는 뜰을 두어 서로를 연결했다. 당시 대성당 입구는 지금과는 다르게 직사각형 대성당의 동쪽 오른쪽 끝에 위치했다.      

(사진1-14. 최초 성묘교회 복원도)


   성묘교회는 이후로 온갖 수난을 당한다. 614년 페르시아인들이 불을 질렀고, 938년 무슬림 폭도들에 이어, 1009년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이 완전히 파괴했다. 1048년 비잔틴 황제가 파티마 왕조의 양해를 얻어 허물어진 재료를 활용해 재건을 시작했고, 1차 십자군이 개축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원통형과 직사각형을 연결하는 근본 형태는 유지했지만, 오랜 기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예루살렘에서 성묘교회 재건에는 각종 물리적 제약이 따랐다. 


   우선, 교회 주변에 이미 많은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찬 터라 교회 형태가 전체적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입구도 최초 위치에서 부득불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입구가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원래 성묘교회 자리에 있던 비너스 신전의 남측에는 로마식 포럼(광장)이 넓게 자리했다. 입구는 이 광장에 면해 있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2대 정통 칼리프, 오마르가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하는 모스크를 건설하며, 광장은 쪼그라들었다. 성묘교회 입구가 볼품없어지게 된 연유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기독교 내부에 있었다. 그리스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이집트 콥트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와 에디오피아 정교회의 6개 종파가 각기 성묘교회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기의 예루살렘에서도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다. 


   1187년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 영웅, 살라딘은 교회를 파괴하는 대신 기독교의 내분을 최대한 이용한다. 이이제이 정책이랄까. 그는 두 가지 조치를 취한다. 먼저, 입구로 쓰이는 두 개의 아치문 중 오른쪽을 메워버린다. 당시 왼쪽 문은 순례객들의 교회 출입용이었고, 오른쪽 문은 교회 내에 묻힌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 출신 왕들의 무덤 입구였다.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출신 왕은 나오지 않을 거란 선언이었다. 


   다음으로 교회 열쇠를 무슬림 가문에 맡기고 매일 새벽 4시에 출입문을 열게끔 했다. ‘누쎄이베흐’ 가문에 교회 문지기 역할을, ‘조우데흐’ 가문에 열쇠 관리를 맡겼다. 기독교 종파 간의 다툼을 국제사회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였다. 기독교 최고의 성지조차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없어 무슬림이 통제한다는 걸 부각해 무슬림에게는 종교적 자부심을, 기독교도에게는 굴욕을 안겨준 것이다.


   살라딘의 영리한 속셈을 기독교계도 간파했겠지만 아무런 조치나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그만큼 종파 간의 다툼이 심각했다는 반증이다. 그 다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지금도 하나 있다. 일명 ‘움직일 수 없는 사다리(Immovable ladder)’. 


   교회 입구 2층을 올려다보면 창틀에 걸쳐 있는 나무사다리 하나가 눈에 띈다. 1757년 기록에 처음 나오지만, 누가 언제 왜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치우려고 해도 6개 종파 간에 합의가 되지 않아 250년 동안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이다. 


   교회 내부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예배실이 아무렇게나 혹처럼 붙어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 구역은 6개 종파 별로 관할 영역이 구분되지만, 종파 간 합의 없이는 의자 하나 옮길 수 없으니 내부는 정말 허름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지난 2002년에는 콥트교회 사제가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유만으로 에디오피아 정교회와 충돌하는 등 종파 간 폭력 사태도 잊을만하면 불거진다. 


   참고로, 교회 내부 관리 원칙은 1852년에 와서야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정리했다. 재밌는 건, 술탄이 내린 칙령이 ‘현상유지(Status quo-remain forever)’였다는 점이다. 칙령을 반포한 날을 기준으로 종파별로 차지한 예배실을 동결하고 추가적인 변동을 불허한다는 내용이다. 이 원칙은 이스라엘이 성묘교회를 실효 지배하는 지금도 유효할 정도다.      

 

(사진1-15. 성묘교회의 '움직일 수 없는 사다리' © Djex93)


  사연은 많지만, 예수의 무덤과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것만으로도 성묘교회가 기독교 세계에서 갖는 상징성은 단연 독보적이다. 게다가 이 최고의 성지는 템플기사단이 창단된 장소이자, 그들이 가진 정체성의 근원이었다. 당연히 기사단이 지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성묘교회가 리바이벌된다. 


   이때 성묘교회는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원본이 가진 고유의 건축적 특징이 도식화되어 사용된다. 오리지널 성묘교회는 건축역사 측면에서도 주목받을 만큼 전에 없던 조형미가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섞일 것 같지 않은 원형(로툰다)과 사각형(예배당)이 처음 만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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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1-10 : By https://www.flickr.com/photos/jlascar/ - https://www.flickr.com/photos/jlascar/10350972756/in/set-72157636698118263/,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0052661

사진1-11 : By Conrad Schick - WuB 16 (2/2000), p 42,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9699866

사진1-12 : By Jlascar - https://www.flickr.com/photos/jlascar/10350934835/,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4030982

사진1-13 : By Djex93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1118767

사진1-14 : http://www.oberlin.edu/images/Art335/Art335c.html,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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