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석 Mar 15. 2023

템플기사단, 이야기의 시작

2/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이스라엘편-2)

   서양 역사에서 템플기사단만큼 오랫동안 각종 음모론 속에 자리잡은 주제가 있을까? 1119년 결성되었으니 벌써 900년도 넘었지만, 그들의 갑작스런 흥망 속에 감춰졌을 법한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어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시작은 십자군 전쟁이다. 1099년 7월,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주변 정복지역에도 십자군 국가들을 속속 들어서자 유럽엔 성지순례 붐이 일었다. 덩달아 지중해 야파 항에서 예루살렘까지 80km의 순례길을 노린 습격과 약탈도 늘었다. 이에 아홉 명의 십자군 기사가 예수가 죽고 부활했다는 골고다 언덕의 성묘교회에서 기사단을 창설한다. 때는 크리스마스. 그랜드마스터는 프랑스인 위그 드 파앵이 맡았고, 기사단 본부로 템플마운트가 배정된다. 그들은 예루살렘 총대주교 앞에서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을 하고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이라 자칭했다. 줄여서 템플기사단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후 템플기사단은 순례자들의 안전한 예루살렘 입성을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하다. 우선, 창단 후 1125년까지 7년 동안 기사단의 활동 기록이 전혀 없다. 게다가 그때까지 기사단은 창단 멤버 아홉 명을 줄곧 유지했다. 유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게 상식적으로 어려웠다. 대신에, 그들은 예루살렘 십자군 왕 보두앵 2세가 즉각적으로 넘겨준 템플마운트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보두앵 2세가 직전까지 왕궁으로 쓰던 템플마운트를 왜 아무런 조건 없이 넘겨줬는지, 그리고 기사단은 7년간 템플마운트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음모론의 시작이다.      


   일부에선 그들이 모종의 비밀임무를 가지고 템플마운트에 은거했다며 의심한다. 그리고 뭔가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게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던 성배일 거라며 수군거렸다. 기사단이 은둔생활을 마치고 난 직후 벌어지는 뜻밖의 정황들은 그 심증에 더욱 힘을 실어줬다. 


   칩거를 끝낸 그랜드마스터가 유럽을 방문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활동 실적이 거의 없는 이름뿐인 기사단을 위해 트루아 종교지도자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 유럽에서 새롭게 입회를 희망하는 자들이 줄을 섰고, 영국의 헨리 1세를 비롯한 왕과 부유한 귀족들은 금은보석, 말, 토지 등 온갖 헌금과 희사를 조건없이 쏟아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한술 더 떠 1139년 특별 칙서를 반포한다. 템플기사단을 교황 직속의 독립조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어떤 교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체 인사권과 재산 소유권을 허용한다는 의미다. 이제 기사단은 맘 놓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인류 역사 최초의 글로벌 부동산 금융재벌로 성장한다. 오늘날 수표 제도도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순례자들은 유럽 본토에 있는 템플기사단 지부에 여행경비를 맡기고 증표를 받았는데, 예루살렘에 도착 즉시 증표를 돈과 교환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순례길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방식인데, 세계 최초의 국제 금융 네트워크인 셈이다.     


   불과 15년 만에 템플기사단은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특권을 거머쥔 권력집단으로 변모했다. 기사단의 수완이 탁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 통에 재정이 딸렸을 교황이나 국왕들이 쩔쩔매며 통 큰 자선가처럼 행세하다니! 당연히 구설에 올랐다. 다른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기사단이 발견한 게 너무 위험해서 입막음이 절박했을까? 혹은 너무 귀한 거라서 너도나도 보험을 들고 구애를 한 걸까?     


   그런데 이후에도 템플기사단은 순례자 보호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한다. 2차 십자군 전쟁에 전투 출전도 다마스커스 공방전을 포함해 세 번뿐이고, 그나마도 모두 크게 졌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고, 명성은 과장되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대체 누가 순례자들을 보호했을까? 


   여기, 또 다른 기사단이 있었다. 흔히 ‘구호기사단’ 또는 ‘몰타기사단’으로 알고 있는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다. 십자군 전쟁 발발 400여 년 전, 이슬람교의 원년인 헤지라(622년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 직전에 교황이 예루살렘에 순례자 병원을 세웠다.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다 1차 십자군 전쟁이 끝날 무렵 병원 수호를 위해 전투가 가능한 기사단이 설립된다. 1113년에는 역시 교황의 직속기관이 된다. 템플기사단은 구호기사단의 용맹함 뒤에 숨었고, 그들의 명성에 편승했다고 보는 게 맞다.     


   템플기사단이 정신을 차린 건 2차 십자군 전쟁이 실패하면서부터다. 예루살렘은 다시 무슬림 수중에 떨어졌고(1187년), 템플마운트에서 쫓겨난 템플기사단은 구호기사단과 함께 전면에 나선다. 그들은 무슬림을 꽤 오래 괴롭혔는데, 그걸 가능케 한 비밀 병기가 성채였다. 


   전략적 요충지마다 세운 성채는 수적 열세에도 방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어 효과적이다. 지금 시리아에 있는 ‘크락 데 슈발리에’(프랑스어로 ‘기사의 성’)에서 그들이 성채를 다루는 솜씨를 잘 볼 수 있다. 가파르고 넓은 해자를 두른 외벽과 본채가 두 개의 동심원 구조를 이룬 성채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방어벽이 높아져서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탑과 같다. 바깥쪽이 뚫려도 항상 더 높은 곳에서 적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의도된 설계다. 덕분에 침입자에게 단 한 차례도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무려 161년간 버티다가, 전세 역전이 어려워진 1271년 안전한 퇴각을 조건으로 무슬림에게 자진해서 넘겨준다. 그 결과 십자군 성채 중 가장 완벽한 모습을 자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사진1-5. 크락 데 슈발리에 성채 복원스케치 © Guillaume Rey)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항거지이자 임시 본부는 지중해 항구인 아크레(아코)에 차려졌다. 십자군 전쟁은 9차까지 이어졌지만, 기사단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딱 한 번, 기회가 있었다. 6차 십자군을 이끈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이슬람 술탄, 알카밀과 평화협상을 통해 1228년 예루살렘을 잠시 넘겨받은 것이다. 


   하지만 술탄이 내건 두 가지 조건에 가로막혔다. 첫째, 템플마운트만은 무슬림이 계속 관리할 것, 둘째, 템플기사단의 예루살렘 복귀는 절대 불가. 술탄은 내전 중이라 전선 확대를 원치 않았고, 황제는 교황 등쌀에 참전은 했지만 싸울 의지가 없던 터라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이었다. 아슬아슬한 평화였지만, 능력을 과신한 교황은 무력 정복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앙꼬(템플마운트)없는 찐빵(예루살렘)을 가져온 황제를 파문하고, 다시 전쟁을 부추겼다. 그 욕심이 결국 십자군의 최후를 불렀다.     

 

   교황의 뜻을 알아챈 프랑스 루이 7세가 7차 십자군을 결성한다. 신심은 깊었으나 무모했던 왕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집트에서 포로가 된다. 전쟁은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전투에 투입된 이집트 군대 소속의 노예 출신 맘루크 전사들이 내친김에 쿠데타까지 일으키며 이집트 권력을 탈취하자 국제정세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강성 무슬림인 맘루크는 마침 이집트를 침공한 세계 최강 몽골군을 단번에 물리치면서 잔인하고 흉포한 기질을 맘껏 드러냈다. 여세를 몰아 1291년에는 아크레까지 함락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얼마 못 가 중동에서 템플기사단의 땅은 단 한 뼘도 남질 않았다. 기사단의 보물은 기사단과 함께 진즉 아크레를 떠났을 것이다. 맘루크들도 보물을 찾았던 듯, 아크레를 정말 완벽하게 파헤쳤다. 십자군이 여기 머물렀었나 싶을 정도로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기사단(그리고 기사단이 축적한 엄청난 재산)의 다음 행방을 쫓아 여행을 계속해 보기로 한다.(이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여행이 얼마나 길어지게 될 지......)


(3화에서 계속,  글이 괜찮았다면 '구독하기' 꾹~해주세요~!)

*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1-5 : By Guillaume Rey - From Guillaume Rey : Étude sur les monuments de l&#039;architecture militaire des croisés en Syrie et dans l&#039;île de Chypre (1871).,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606936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