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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부부 Aug 24. 2020

삼신상 소동

아내의 닦달에 새벽 1시에 시금치 사러 간 남편



아이 백일은 생각보다 큰 행사다. 예전에는 백일이 채 지나지도 않아 죽는 아이들이 많다고 해서 잔치를 했다고 한다. 요즘에야 의학의 발달로 영아 사망률이 현저히 줄어 백일잔치 의미가 축소됐다곤 하지만, 엄마 입장에선 어쨌든 아이가 아프지 않고 무사히 백일을 보낸 것이 고마운 마음뿐. 그래서 나는 '백일상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란 일각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일상을 직접 차려주기로 했다.


더욱이 백일잔치는 아이가 태어날 이후로 처음 맞는 기념상이다. 요즘에는 아이의 50일을 기념해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아이가 아프지 않고 무사히 시간을 보내준 것을 감사하는 백일은 50일 촬영 의미와는 비교불가다. 


그래서 그런지 백일에는 아이의 무병장수를 바라며 준비해야 할 것들이 꽤 있다. 명주실을 준비하거나 백설기, 수수팥떡 등을 맞추는 일 등이다. 삼신상도 그중 하나다. 간추려 말하자면 백일 간 우리 아이를 잘 돌봐주신 삼신에게 감사의 의미를 전하는 일이다.


나는 삼신할머니의 존재를 믿고 있다. 원더키디가 우주를 탐험해야 할 2020년에 삼신할머니라니. 비웃음을 살 소신이지만 나는 삼신할머니의 존재만큼은 있다고 믿는다.


임신테스트기에 두줄이 뜬 날, 우리 부부는 침대에 누워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관 센서등이 깜빡거리는 게 아닌가. 오작동이 한 번도 없었던 센서등이었다. 신기한 건 고치려고 마음먹은 다음날 센서등은 이상이 없었다는 거다. 가족들과 함께 백일잔치하는 날 저녁에도 갑자기 센서등이 깜빡였다. '정상 작동하던 센서등이 왜, 하필, 백일잔치하는 날..? 눈에 보이지 않은 뭔가가 왔다 간 게 틀림없다' 


나는 이 두 번의 센서 오작동으로 삼신할머니의 존재를 확신하게 됐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신들이 우리 아이를 지켜주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삼신상을 차리리라 마음먹었다. 블로그에 나온 대로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나물, 미역국, 밥, 정화수를 준비했다. 


간단해 보였지만 삼신상 차림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금기사항이 있었다. 1) 칼을 쓰지 말 것=아이가 단명할 수 있어서 2) 간을 보지 말 것=신보다 먼저 먹으면 안 되니까 3) 간은 참기름과 간장으로만!=이유를 모르겠음. 4) 음식은 당일에 만들고, 만든 음식은 그날 다 먹을 것!=역시 이유는 모름 5) 해가 뜨기 전에 삼신상을 올릴 것! 6) 동쪽에 삼신상과 아이를 둘 것.


아이를 아기띠에 업고 장을 봤다. '삼신할머니는 한국사람일 거 아냐.'란 마음에 국산 도라지, 고사리를 사느라 슈퍼 두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12시를 넘기자마자 미역, 고사리를 불리고 시금치를 다듬었다. 


사건의 발단은 시금치를 다듬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비몽사몽으로 시금치를 다듬다가 칼을 써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간이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을 쓰면 아이가 단명한다는 말이 너무나도 마음이 쓰였다. 안 올리자니 찝찝하고 올리자니 더 찝찝했다.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급하게 깨웠다. 다행히도 집 앞에는 24시간 운영하는 마트가 있었고, 지금 당장 시금치를 사 오라고 부탁했다. 


새로운 시금치를 구했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내가 잘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었다. 아이가 아직은 새벽 수유를 한 번은 해서 새벽 3시에는 음식을 하기 시작해야 해뜨기 전인 새벽 5시 30분엔 삼신상을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차저차 남편이 사 온 시금치를 손으로 뜯고 찢어 씻어두고 하니 어느새 새벽 2시였다. 새벽 3시까지 한 시간만 더 자려니 잠이 오질 않았다. 아이 얼굴만 멍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자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 새벽 3시가 됐다. 일어나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을 준비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정화수 물은 끓여 식혀두고 밥은 전기밥솥으로 예약해뒀다.


그러고 나니 아이가 밥 달라며 깼다. 아이 밥을 타고 먹이고 트림시키고 나니 어느새 새벽 5시. 다소 빠듯했지만 얼른 집안 거실 동쪽을 향해 상을 차리고 그 앞에 아이를 눕혔다. 남편을 깨우고 축문을 던져줬다. 부끄러워 못 읽을 것만 같은 축문을, 남편은 뻔뻔히도 잘 읽었다. 아이의 건강을 바라면서 읽었겠지. 그리고 나선 삼신할머니와 아이만의 시간을 10분 줬다. 


엄마한테 삼신상을 새벽에 차렸다고 하니, '엄마가 되더니 별걸 다한다'라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일 잘 아는 엄마는 분명 새벽에 내가 꼼지락 거린 것 자체가 신기했을 터다. 똥 손인 내가 나물을 세 개나 무쳤다니. 나도 엄마가 됐나 보다. 삼신상을 차려보니 가족을 향한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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