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였던 아빠의 육아일기
사실 결혼식이 있던 그날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것뿐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각자 출근을 하고 퇴근 후 집에서 다시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한 뒤 동네나 지하철을 타고 조금 먼 곳까지 가서 놀다 들어오곤 하였다. 주중에는 다음 날 근무로 인한 부담감이 있어 이벤트 없이 지냈으나 주말에는 근교로 여행을 가거나 부모님을 찾아뵙곤 했다.
비혼일 때부터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으며 결혼 후 삶에 대해 크게 기대하고 살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결혼 전과 결혼 후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화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소소한 변화들이 나의 삶에서 생기긴 했다.
개인적인 변화들
1. 결혼을 하고 나의 삶을 이전과 비교했을 때 '노'에서 '유'로 수식어가 변화되었다. 요즘은 결혼이 늦고 결혼 생각이 없는 청년들이 많아져 사회에서 '노총각'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하며 실례가 되는 경우가 많아 듣는 횟수는 적었지만 여하튼 나는 '노총각'에서 이제는 '유부남'소리를 듣게 되었다. 가끔 '새신랑'이라는 소리도 듣게 되었는데 이런 단어들이 '내가 결혼을 했구나'라고 한 번 더 각인이 되기도 했다.
2. 이런 무형의 변화 말고도 실제로 체감하는 것들도 늘어났다. 예전에는 여행을 가든 등산을 하든 항상 당일치기로 했었다면 이제는 1박 이상 여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부부의 신분이니 당연히 허락을 받거나 사전에 통보고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없어졌다. 그만큼 둘이서 추억을 쌓고 함께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 자유로움과 책임이 늘어나고 있었다.
3. 가끔은 집에서 혼자 잘 때 가위를 눌리곤 했다. 기가 허하거나 집에 수맥이 흘러 가위를 눌린다기보다는 램수면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가위를 눌리고 일어나면 으쓱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난 뒤 이런 일들이 없어졌다.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어서 항상 일어나도 함께여서 안정감이 더 생긴 것 같았다. 이뿐만 아니라 퇴근은 내가 항상 늦었는데 집에 먼저 와 있어서 누군가 나를 반기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은 육아휴직으로 내가 반겨주지만 내가 복직을 하게 되면 딸과 아내가 함께 나를 반겨 주겠지.. 이것은 참으로 기쁜 일인 듯하다.
4.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존재했다. 혼자였을 땐 어디 가고 싶을 경우 지금의 아내에게 통보만 하고 이동하곤 했다. 대부분 함께 했지만 조금 먼 지역에 여행을 가고 싶거나 본가에 내려갈 땐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그게 잘 안 됐다. 한 번은 본가에 혼자 내려간 적이 있는데 어머니께서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계속 물어보셨다.
'왜 혼자 내려왔냐?'
오랜만에 혼자 와서 친구도 만나고 잠깐 외출도 하고 좋기만 한데 말이다. 혼자 본가에 내려간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혼자 가는게 편하다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아닌 분도 분명 있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들
1.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혼자 살 땐 생활비를 목록화했을 때 몇 가지 안 됐다. 대출금, 공과금, 통신비, 생활비, 부모님 용돈, 저축 이 정도로 간략하게 요목화 할 수 있었는데 결혼 후에는 이 것들 말고도 각 가정의 경조사도 추가되고 -혼자 살 땐 어머니 생신 때 용돈만 드리고 끝냈지만 아내는 선물도 드려야 한다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도 많아졌다.- 예상 밖에 목록들이 하나 둘 생겨 나기 시작했다.
2. 결혼을 하면서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위생에선 나보다 더 뛰어난 아내는 청소를 주로 하고 나는 오랫동안 자취를 한 탓에 요리를 하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밥 하기 싫으면 외식을 하거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먹는 등 아주 간단하게 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함께 먹어야 했기에 요리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그렇게 부담되거나 힘들지 않았으나 다양하고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겨 부담이 되기도 했다.
3. 집 유지보수엔 내가 나서서 해야 했다. 내부를 리모델링했지만 수리할 곳이 하나 둘 생겼다. 내 집이 아닐 땐 그냥 두거나 임대인에게 연락해 수리하는 일들도 이젠 우리가 스스로 해야 했다. 셀프 수리가 가능한 장비들이나 물품들을 구입해 집 여기저기를 보수하기도 하는 횟수가 늘었다. 덕분에 그동안 사고 싶었는데 못 샀던 장비들을 하나씩 사보는 기회도 생겼던 것 같다.
4.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환경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일 텐데 이런 나의 모습으로 인해 장인, 장모님, 처제 등이 힘겨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아내도 처갓집에 가면 들어가기 전에 제발 '네'만 하지 말고 이후에 더 붙여서 말을 하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나는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해 더 위축되기도 했지만 분명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맞는 것 같다. 연기가 아니라 편안한 사람이 되는 것.. 쉽고도 어려운 것 같다. 그렇게 자주 봤는데도 아직 나는 마음을 열 준비가 안 된 것일까? 아니면 사회성이 떨어져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여러 번 생각하고 또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다.
가족... 어색하지만 큰 힘이 되는 존재
결혼을 하고 나니 두 가족이 생겼다. 예전부터 나를 키워 주셨던 우리 어머니와 형, 누나, 말씀이 많으시나 정이 많은 매형과 조카들 그리고 아내의 가족.
우리 가족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내가 함부로 하기도 한다. 그러다 누나한테 혼이 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사이가 좋아 자주 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꽤 오랜 시간 써야 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덤덤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도생'
말 그대로 서로에게 피해 안 주고 각자 잘 살면 되는 그런 가족인 것이다. 이런 가족에 밝고 명랑한 아내 같은 사람이 함께 하게 되었으니 우리 어머니는 복이 있으신 것이다. 어쩌면 자기 가족과 다른 분위기일 텐데 잘 받아 주고 챙겨 주고 있으니.. 본가에 같이 내려가면 오히려 내가 더 신경 쓰여 짜증 내고 그러다 똑 혼나기 일쑤다.
아내의 가족은 내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계중심의 가족이었다. 가족 간 서로 잘 챙기고 욕심이 없고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밝은 모습의 가족.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외할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처제까지.. 모두 좋으신 분들이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내겐 더 신선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보니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처음 인사 드리러 간 날부터 지금까지도 어색함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늘 잘해주시지만 내가 표현하지 못해 서운해하시는 것 같은데 이 또한 너무 죄송하다. 항상 감사하다고 생각만 하면 뭐가 되는 것도 아닌데 입 밖으로 표현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늘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언젠간 이 글을 보시겠기만 아무 내색하지 못해서 죄송하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가아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말을 잘하지 않는 우리 가족이나 밝은 아내의 가족 모두 큰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만약 혼자 살아갔다면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만 보며 살았을 것이다. '각자도생'이라고 하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원망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좋은 일이 있어도 나누기보다는 또 그러려니 하면서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다른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좋은 일은 축하하고 어려운 것도 함께 고민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모습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내가 필요한 것은 마음을 조금 더 열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아닐까!
결혼생활이 분명 쉬운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생활에서도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기까지 싸우기도 하며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들을 잘 다듬고 좋은 모습들이 쌓여간다면 분명 괜찮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은 함께 보고 맛있는 것은 함께 먹고 어려운 것은 서로 지혜를 모으는 그런 사이. 그리고 그 사이에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가족까지. 분명 결혼으로 이룬 가정은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나중엔 더 좋은 것들이 많이 쌓여있길 바라며 오늘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