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였던 아빠의 육아일기
그러던 중 우리의 삶에서도 신혼생활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생기기도 하였다. 우선 '우주라미' 모임의 한 선생님께서 아기를 가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보다 3년 정도 일찍 결혼하여 신혼생활도 길었고 그 선생님 부부가 간절히 원했기에 열심히 응원을 했다. 간혹 가족행사 때 외할머니를 만나면 우리에게도 아기를 언제 가질지 물어보곤 하셨다. 하지만 양가 부모님들께서는 언제 아기를 가질지, 가질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으셨다. 이때까지는 우리의 결혼생활에서 아기는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았다.
나 같은 경우엔 마흔이 넘은 나이여서 아기를 가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내가 지금 아기를 놓더라고 아이가 성인이 되는 19세가 되면 거의 60을 바라보는 나이라서 회의적인 부분이 컸다. 아내와 가끔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이에 대한 부담감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아내 역시 결혼 당시엔 아이에 대한 것보다 여행이나 생활에 더 관심이 컸었다. 방학 때 어디로 여행을 갈지, 무엇을 하며 지낼지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나로 인해 장기간 여행이 어려워지자 대학원에 진학한 나를 원망하기도 하였으나 아이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보다는 우리의 삶이 더 우선 이었던 것이다. 2022년 연말에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이를 갖고 싶어 했던 선생님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축하해주고 태명은 무엇인지, 성별이나 이름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또, 아내의 대학동기 친구도 임신을 해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 그러니깐 우리보다 먼저 결혼했거나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사람들이 하나 둘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실을 보려 하였다.
그러다 아내가 한 번씩 아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닮은 아기 보고 싶지 않아?'
'응.. 난 별로 생각이 없는데...'
'그래.. 우리도 아기를 낳아볼까?'
'무슨 소리.. 난 아기 생각이 전혀 없어...'
내가 아기를 낳을 생각이 없었던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나이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결혼 후 마흔두 살이 되어 아기를 낳는다 해도 체력적으로 큰 부담이 생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 아이가 커서 초등학교를 가면 친구들 아빠는 이제 40대 초반이나 중반 정도 될 텐데 나는 50대 초반이 되니 늙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내가 싫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어머니와의 추억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머님께 늘 죄송한 마음이 크다. 어머니가 서른네 살 정도 되셨을 때 나를 나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엔(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막내인 내가 늦둥이로 취급을 받을 때였다. 아버지가 내 나이로 8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홀로 5남매를 키우셨다.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나 어머니 손을 잡고 육지 시장을 따라갔었던 기억-당시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처럼 형들은 외지로 돈을 벌로 나갔고 누나들과 나는 어머니와 섬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께 많이 맞았던 기억, 나를 꼭 잡고 다녔던 기억 등은 아직도 머릿속에 있다. 아무튼 섬에서 고생만 하시다가 더 이상 살아갈 환경이 안 되어 육지로 이사를 나왔는데 어머니는 친구들의 어머니보다 왜소하고 더 늙어 보였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우산 없이 학교를 와 끝나고 어쩌나 하고 있었다. 당시엔 스마트폰 같은 연락 수단이 없다 보니 비가 오면 어머니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가 당연히 일을 하러 가신 줄 알고 뛰어갈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여러 어머니들 사이에 우리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계셨다. 왜소하고 늙어 보이는 그 모습이 너무 창피해서 그냥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시장에 들러 나 먹으라고 꽈배기를 사오셨는데 나는 말없이 그걸 먹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왜 우산을 안 쓰고 갔는지 물어보지 않으셨다.
이런 일들이 몇 차례 더 있었는데 내가 지금 아이를 낳으면 꼭 이렇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어머니께 했던 못된 행동들을 내가 도로 받을 것 같아서...
개인적인 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를 키우기 너무 힘든 환경이 된 것 같아서였다. 예전엔 한 가정에 2~3명 정도 형제, 자매가 있고 어머니가 집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아버지가 외벌이를 하더라도 키울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말 못 할 사정들이 많았겠지만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들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자란 동네에선 아무런 사건이 없었으니 말이다. 동네에 나가기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많아 함께 놀다가 저녁에 각자 집으로 들어가고 해도 문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가정에 많아야 2명의 자녀고 부모님들은 모두 맞벌이를 하고 있다. 우리도 맞벌이를 하고 있지만 둘이 먹고 살기엔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아이까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제적 부담감이 증가하고 이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더라도 양육할 수 있는 환경에서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다. 지금은 육아휴직을 쓴 부모가 있어 함께 있지만 복직을 하고 난 뒤엔 아이를 집에 혼자 있게 할 수는 없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나중엔 유치원 그 이후엔 학교를 보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학원도 보내야 하고 대학까지 모두 졸업을 하고 직장을 구해야 한 시름 놓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사고가 안 일어나면 좋은데 우리 사회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만 해도 감사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천재지변, 사회적 사건 등 예측불가능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커 아이를 놓는 게 부담이었고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부담해야 할 사회적 책임감이 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이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론은 아이를 키우기 힘든 환경이 대전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마음을 바꾼 계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어 친구나 직장 내 인생 선배님들께 많이 물어봤다.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한, 아기를 키우는 것에 대한 생각들..
어떤 분은 '힘들다. 그래도 말 못 할 행복감은 준다.'라고 하셨고, '둘이서 잘 살아.. 아이 키우기 힘들다.'라고 이야기해 주시는 분도 계셨다.
그중 친한 선생님께서 이야기해 주신 것이 있는데...
'둘 중에 누구 한 명이 원하면 해야 돼. 나중에 시도도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시도했는데 안 된 것이 더 나아...'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했는데 역시 아내도 공감을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도는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아이가 자라 갈 환경이 힘들지라도 그 또한 본인이 이겨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그런 환경을 이겨 낼 수 있도록 건강하게 키우고 지지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우리 어머니께 했었던 어리석은 행동들을 아이가 나에게 하더라도 그냥 받아주어야겠다고 생각도 들었다. 단,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다짐도 함께 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았다. 함께 아이를 가져보자고 이야기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산도 경험하고 6개월이 넘도록 아기는 생기지 않았다...
23년 2월 새 학기를 준비를 마친 뒤 둘이서 여행을 갔는데 별을 보고 '아기 생기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도 하고 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주말 아침 우연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