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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우리 Sep 21. 2024

2. 기간제 교사의 서러움

특수하지만 특수하지 않은 특수교육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는 '기간제근로자라 함은 기간의 정함이 있는 근로계약(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를 말한다.'


'기간제 근로자' 학교에서는 기간제 교사라고 한다. 내가 처음부터 기간제 교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임용을 준비하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고민이라기보다 걱정과 두려움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편입 후 학부 졸업할 때까지 봉사활동과 한 달간의 교육실습이 다였던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으니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학부 마지막 학기엔 임용시험 준비로 모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오로지 시험 준비만 했다. 하지만 일을 안 해본 적이 없던 나는 계좌에서 돈이 줄 때마다 늘 불안했고 빨리 일을 하고 싶었다. 이 생각이 아마도 패착이 아니었을까 싶다.

임용시험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곳이 'ADHD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였다. 단순히 ADHD라기에는 적대적 반항장애나 품행장애를 수반한 학생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였다. 아이들만큼이나 충동적으로 이력서를 넣고 면접이 끝난 뒤 같이 일하자는 소리를 들었다. 짐을 챙기러 잠깐 집에 들렀다 다시 그 학교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업무 인수인계도 없이 바로 투입되었다. 장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약간 모순적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쩌면 대안학교라는 것이, 대안교육을 한다는 것에 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교육청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되다 보니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고 하루 6시간씩 주 30시간의 수업과 검정고시 시험 준비를 위한 야간 보충수업까지 해야했다. 어느 순간부터 몸은 지쳐가고 있었고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월세와 생활비, 기타 경비까지 포함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다. 교육도 중요했지만 내가 일 하는 만큼의 보수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겨 7개월가량 일을 하고 대안학교를 그만뒀다. 내부적인 일도 있었지만 당시 한 달 등록금이 250만원을 내고 다니는 학생들에게 내가 그만큼의 교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안교육이 대안이 안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기간제 교사 공고를 찾았고 운 좋게 학기 중간에 6개월 정도 일을 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공교육으로써 특수교육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학교였다. 그 학교가 너무 좋았던 것일까? 학생들도 착하고 동료교사도 많고 4시 20분이면 업무가 끝나며 급여는 호봉제로 내가 대안학교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이 받아 생활은 더 안정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의 일이 나에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계약이 끝난 뒤 임용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학교 동생들이 해야 하는 공부를 알려주기도 해서 정보가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혼자서 공부를 했다. 인터넷 강의도 들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유명한 강사 책 한 권만 사서 공부를 했는데 그 해 시험에선 당연히 떨어졌다. 내가 공부한 내용보다 새로운 내용들이 많이 나와서 풀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다시 돈을 벌어야 했고 기간제 교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시작한 학교는 특수학급이 아닌 '특수학교'였다. 중증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학교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학교 교사 모두가 특수교사라는 점이었다. 남자라는 이유로 담임을 맡게 되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특수학교만의 장점이 있어 지낼만했다. 동학년 선생님들도 처음엔 많이 챙겨 주시고 부담임 선생님도 잘 만나서 학급을 운영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학교 업무도 힘겨운 것은 대부분 기간제 교사에게 넘긴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컴퓨터를 전공했던지라 부서 업무도 어렵지 않게 해 나갔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학교 문화였다. -차후 학교 문화에 대해선 언급할 일이 있을 예정이니 언급은 하지 않겠다.- 국립, 공립, 사립 각 학교마다 혹은 학교장이 누군가에 따라 문화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특수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일반학교 특수학급에 있을 때는 약간 '섬'같은 존재여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데 특수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기간제 교사의 한계, 서러움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 기간제 따위가 회식 자리를 빠져!'

인용된 문장이 아니라 특수학교에서 일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이 난 이미 한 달 전에 선약이 있었고 하필 그날이 중학교 과정 전체 회식이었다. 동학년 선생님이 같이 가자고는 하셨지만 선약이 있어서 빠져야 할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당일 나는 회식대신 선약 장소로 갔고 다음 날 아침 그 동학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그 자리엔 다른 두 선생님도 계셨는데 대뜸 저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놀랐다. 두 번째는 '내가 잘못했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설명을 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상황을 마무리 됐지만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선생님 다시 불러 자기가 좀 심한 말을 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은 못 주워 담으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게 동학년 선생님들과 어색하게 1년을 보내고 다음 해 나오려고 했으나 동기 선생님들이 한 해만 더 하자고 하기도 했고 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싫기도 하여 재시험을 보고 1년을 더 하게 되었다. 그 해 나는 정말 교직생활에서 최악의 동료교사와 부장교사를 경험했고 결국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게 되었다. '기간제 교사가 인정받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다른 OO부장교사처럼 기간제 교사를 빡세게 굴려야 했다.', '그 새끼는 시험에 떨어져도 된다.' 등등 상처로 가득한 한 해가 되었다. 물론 그분들 입장에서 기간제 교사인 내가 굽신굽신 하지 않고 뻣뻣하게 지내는 모습이 싫었을 것이다. 동화되지 못하고 자기만 잘 난 교사인 것 같이 보였을 수도 있다. 지난 편에서 쓴 것처럼 내가 특이한 교사로 보였을 것이다. 그 학교를 나오면서 내 인성에 대해 문제가 있나 생각이 들 정도였고 자존감은 많이 낮아져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형같이 잘해주고 늘 같이 놀아주는 모습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상처로 가득했지만 기간제 교사 생활은 계속되었다. 솔직히 적지 않은 나이에 생활비와 인강비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에 일을 계속해야 했다. 경기도에 있는 특수학교에 합격하고 난 뒤 고3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 학교도 동학년이 3학급이었는데 다 젊은 교사였다. 동학년 말고도 이 학교에는 정교사, 기간제 교사 할 것 없이 대체로 젊은 교사가 많았다. 나는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친한 선생님 덕분에 젊은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상처들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진 못했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만 최선을 다했다. 학생들이 하교를 하고 일이 없는 오후 어느 때 모여서 수다도 떨고 커피도 마시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 저녁엔 공부를 하고 매일 같이 같은 루틴으로 지냈다. 그래도 그 젊은 선생님들은 볼 때마다 늘 웃는 모습으로 이야기해 주었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1년이 다 지나갈 때쯤 부담인 선생님께서 우리 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내 칭찬을 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나를 좋게 보고 좋은 말까지 해주니 고마웠다. 예전에는 상처뿐이었는데 이 학교에서는 그래도 좋은 말을 해주는 선생님들이 더 많았다. 그동안의 상처로 닫혔던 마음이 많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모든 학교가 차갑고 권위적인 것이 아니라 학교 구성원이 누군가에 따라 교사의 자존감이 달라질 수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즐겁게 2년간 일을 하고 나는 현재 다니는 학교 정교사로 임용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직접 경험한 기간제 교사 시절의 이야기를 일부만 언급했지만 교직 생활의 절반인 6년 정도를 기간제 교사로 지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장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 모두가 천사 같고 마음이 넓을 것 같았지만 여기도 결국 회사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쩌면 일부 학교는 더 폐쇄적인 곳일 수 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직'을 떠나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함께 나아가는 존재로 지내기도 한다. 나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할 수도 있고 임용 시험을 보기 전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짧게 기간제 교사를 해보는 사람도 있다. 간혹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을 하고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시는 선배교사도 있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기간제 교사의 삶이 힘겨운 것은 사실이다. 우선은 기간제 교사 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내정자'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기존에 기간제 교사를 하시던 분, 정교사의 지인 등 이미 뽑힐만한 선생님의 자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경우가 있다. 설령 뽑히더라도 다음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이 담임 여부이다. 나 같은 경우도 매년 담임을 했다. 남자라는 이유로,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기간제 교사 선발에서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여러 이유로 담임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담임을 선호하는 경우라면 괜찮겠지만 나처럼 공부를 병행한다면 기간제 교사 담임은 기피될 수밖에 없다. 담임으로서의 업무량도 상당하지만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와의 관계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럭저럭 1년을 잘 지내더라도 다음 해 1~2월이 되면 또 걱정이 찾아온다. '내가 이 학교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까?', '다른 학교 기간제 교사를 구할 수 있을까?' 보통 한 학교에 들어가면 4년 정도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정교사 수에 따라 기간제 교사의 수도 조정이 된다. 운 좋게 기간제 교사 TO가 있더라도 시험을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자동 연장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매년 시험을 봐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어제 같이 웃고 지내던 (정교사) 선생님께서 나를 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매년 스트레스가 많은 시점이 2월이 될 수밖에 없다. 임용시험을 병행한다면 물리적인 시간도 적어 더 힘들다. 소위 '올인'을 하는 분들은 적어도 하루에 12시간을 공부하지만 퇴근을 하고 공부를 한다면 진짜 많이 해야 6시간 정도다. 그만큼 공부 시간이 적다 보니 합격도 늦어질 가능성이 크다.-똑똑한 분들은 한 번에 붙기도 한다.-

그렇다고 기간제 교사가 능력이 떨어질까?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와도 같다. 정교사 시험에 붙었느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 -개중에 학교와 관련된 모든 일을 대충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분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학생들과 자기 일을 방임하는 나쁜 교사일 것이다.- 같이 기간제 교사를 하던 선생님 중에선 수업을 정교사 선생님보다 더 집중력 있게 하시고 업무처리도 잘하시는 분도 많이 봤다. 지금 학교에서도 능력이 뛰어나지만 여러 사정으로 기간제 교사를 하고 계시는 분도 계신다. 반대로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교사도 있을 수 있다. 처음에 내가 다녔던 특수학교처럼... 그런 교사들은 이미 기간제 교사에 대한 무시가 기저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수업이나 학생들 생활지도에서 힘든 업무를 주고, 위로나 응원보다는 핀잔을 주거나 주눅 들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는 오래 일하면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들 수도 있다. 아니면 내 귀와 눈을 닫고 사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기간제 교사가 평생 기간제 교사로 지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전에 있던 학교에서 한 부장님께서 그런 말을 해주셨다.

'선생님이 평생 기간제 교사 할 것도 아니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데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잘 보여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직'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을 내면을 봐야 한다. 정말 좋은 교사라면 기간제 교사 여부를 떠나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며 인정받고 교직생활 할 수 있도록 협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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