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흰머리가 돼도 예쁠 거예요
엄마의 흰머리를 뽑고 난 뒤 딸이 한 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첫째 아이는 간식을 먹고 뒹굴뒹굴하다가 갑자기 내 등뒤에 찰싹 붙었다.
더우니까 떨어지라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질끈 묶여있던 내 머리끈을 휙 풀어버렸다.
"엄마, 오랜만에 흰머리 뽑아줄게요."
심심했던 것인지, 용돈을 벌어서 학교 앞 문구점에 갈 요량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선선히 내 머리카락을 맡겼다.
아이는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넘기며 매의 눈을 하고 흰 머리카락 찾기에 나섰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아이가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주니 잠이 저절로 왔다.
오늘도 허탕이겠지 생각하며 여유를 즐겼는데 이런.
"하나, 둘, 셋, 넷. 엄마, 이 천 원 주세요."
흰 머리카락 1개당 5백 원, 계산도 척척이다.
혹시나 엄마가 깜빡하고 안 줄까 봐 걱정이 되는지 첫째 아이는 지금 바로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흰머리를 뽑으면 용돈을 주기로 약속했으니 주는 것이 맞긴 하지만 떼먹은 적도 없는데 이렇게 재촉을 하니 왠지 순순히 주기 싫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동안 겨우 하나씩 찾아냈던 것에 비하면 아이 입장에서는 큰 수확이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갑자기 흰머리가 늘어난 것 같아 속상한데 지갑까지 열어야 하다니.
나도 어릴 적 엄마의 흰머리 담당이었다.
엄마가 내 다리를 베고 누우면 나는 족집게를 들고 엄마 머릿속을 샅샅이 살폈다.
젊은 시절에도 엄마는 항상 짧은 머리를 유지했기에 맨손으로는 도저히 흰머리카락을 뽑을 수 없었다.
뽑힐 듯 뽑힐 듯 뽑히지 않는 흰머리와 사투를 벌이다가 족집게 덕분에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때 나는 1개당 100원을 받았었는데 용돈을 받는 것도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엄마 머리에서 흰머리카락을 뽑고 나면 내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어린 마음에 '흰머리는 나이 든 사람만 나는 거 아닌가? 우리 엄마는 나이 든 사람 아니야!' 하는 유치한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흰머리카락을 뽑지 말라고 하셨다.
나이 들수록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다며 그냥 염색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 머릿속을 살필 틈 없이 지내던 때였다.
이제 엄마는 흰머리를 뽑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흰머리가 부쩍 는 엄마 머리를 보면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문득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마음은 숨긴 채 염색하실 때 된 것 같다고 얘기하니 엄마는 "염색도 부지런해야 하는 거 같아. 그냥 이대로 살련다." 하신다.
엄마의 흰머리를 뽑으며 좋아하는 딸을 보니 왠지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내 흰머리는 나날이 늘어갈 텐데 이러다가는 내 지갑이 텅 비게 생겼다.
100원으로 내리겠다고 하면 반발이 크겠지, 그냥 나도 엄마처럼 흰머리 뽑지 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약속했던 이 천 원을 주면서 "딸, 근데 엄마 갑자기 할머니 되는 거 아니야?" 하니까 눈이 동그래진다.
"엄마 머리 하얗게 되면 어떡하지?" 하고 물었더니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마는 다 흰머리가 돼도 예쁠 거예요."
기분이 좋아서 아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내 입꼬리는 씰룩씰룩 올라갔다.
당분간은 딸과 나의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흰머리 잘 뽑아달라고 해야겠다.
제목사진출처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