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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ffalobunch Aug 07. 2019

버리는 자와 버림 받은자,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늦은 퇴근길이었다. 발끝까지 내려온 피로 덕분에 무거운 한걸음을 떼기 힘들어 땅을 긁는 소리가 마음처럼 요란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검은 물체가 계속 따라오는 것 아닌가? 내가 멈추면 같이 멈추고 내가 걸으면 같이 걸었다.

  나의 걸음에 맞춰 따라오는 검은 물체. ‘길 잃은 강아지인가? 주인 없는 강아지인가? 눈길 주면 마음 아프니까 그냥 모른 척 하자’라고 생각하면서 무거운 잰걸음으로 걷는데 그 걸음에 맞춰 계속 따라오는 검은 물체.

  알고 보니 고양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고양이에게 할퀴어 살이 깊이 파인 경험이 있어서 몸집이 큰 고양이는 좀 겁이 났는데, 이 고양이는 아직 다 자란 성묘는 아닌 듯 보였다. 게다가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고 사람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반려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졸졸 따라오더니, 발라당 배를 까고 눕기도 하고, 몸을 비비기도 하고, 그르릉 그르릉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렇데 한참을 놀아 줬는데, 시크하게 떠났다. 나는 계속 나를 따라오면 어떻게 하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진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너 너무 시크한 거 아니냥?

  그리고 다음날이었다. 다음날도 비슷한 시간 늦은 퇴근을 했는데, 괜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발걸음은 느릿느릿해졌다. 한걸음 내딛으며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하던 순간, 내 걸음에 맞춰 장난이라도 치듯이 따라오는 검은 물체. 아니나 다를까 그 녀석이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반가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이 녀석은 나의 늦은 퇴근길 친구가 되어 주었고, 나는 가방에 늘 간식거리를 챙겨서 출근을 했다.

  이 녀석은 아파트 내 사람들도 다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비비'라고 불렀다. 버려진 것이 안타깝고 더군다나 새끼 고양이라서 그런지, 아파트 주민들이 물이랑 사료를 주기적으로 준다고 들었다.

  퇴근길 친구가 되어 줬던 ‘비비’는 어느 순간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지만, 주인이 ‘비비’를 찾았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파트 주민들 중에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경비실과 관리센터에 민원을 엄청 많이 넣었다고 했다. 결국 그 불똥이 경비실 아저씨들 한테 튀겨서 고양이를 다른 곳에 놔뒀다고 했다. 사실 좋게 말해 놔둔 거지 다른 곳에 또다시 내다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예전에도 한차례 그런 적이 있었는데 용케 아파트를 다시 찾아와서, 이번에는 경비실 아저씨 한분이 그 고양이 눈을 가리고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이나 간뒤 고양이를 놔두고 왔다고 했다. 그분도 집에 반려견을 키우는 상황이라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고 했다. 버리고 놔서도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는다고 했다.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

  애초에 주인이 버리지만 않았어도 마음 한구석이 이렇게 착잡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경비실 아저씨도 두세 번이나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키우려고 마음먹었을 땐, 듬뿍듬뿍 사랑을 줬을 것이다. 결국엔 뒤돌아서 싸늘하게 내다 버릴거였으면서 말이다. 머리 검은 ‘인간’이라는 짐승들이 제일 잔인하고 악랄한 것 같았다.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랑. 과연 그들은 사랑을 한 것일까? 생명을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도 똑같은 도구로 쓰임 받길 바란다.

  집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15년 정도이지만, 길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애완견 애완묘라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반려견 반려묘 반려동물 가족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만큼, 동물을 소유물로 여기는 시대는 지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그리고 사랑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순간, 그들 존재의 숭고함은 탐욕의 전유물로 전락한다. 누가 사랑을 그렇게 자판기 뽑기 하듯 뽑아서 하는가? 늘 처음보다 마지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다. 적어도 그 헤어짐의 마지막에는 나 자신 또한 피동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수년 전 그날의 ‘비비’가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지, 아니면 아직 어디선가 애교를 부리며 누군가의 퇴근길 친구가 되어 줬을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비비’의 마지막이 행복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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