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시절의 유래
축구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리즈시절의 리즈에 대한 유래를 알 것이다. 현재 프리미어리그의 하부리그(2부 리그)인 EFL챔피언십에 소속되어 있는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중 하나인 리즈 유나이티드 FC (Leeds United FC)의 전성기 시절을 추억하며 생긴 말이 바로 ‘리즈시절’이다.
이유는 그러하다, 리오 퍼디난드, 제임스 밀너, 로비 킨, 하셀 바잉크, 앨런 스미스, 해리 키웰, 마크 비두카 등을 앞세워 챔피언스리그와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에 군림하던 아주 매력적인 팀이었다. 그러다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다른 명문 구단으로 이적하였고, 이 여파로 2004년에 2부 리그로 강등, 2007년에는 3부 리그까지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특히 해버지(해외축구의 아버지) 박지성의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Manchester United FC)의 동료이자 전 리즈 유나이티드 선수였던 앨런 스미스를 놓고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의 앨런 스미스’의 수려한 외모와 실력을 떠올리게 되면서 자주 쓰였던 단어가 ‘리즈시절’이었다.
예컨대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리즈 유나이티드 소속이었던 시절의 앨런 스미스가 외모도 좋았고 실력도 훨씬 좋았는데..’ 하면서 과거 전성기 시절을 추억하는 고유 명사로 썼다. 마치 역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듯한 앨런 스미스의 리즈시절은 당시 베컴과 버금가는 외모를 자랑했기 때문에 더더욱 리즈시절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안성탕면이 아니었 아 아니 안성맞춤이 아니었을까.
나의 리즈시절
나의 리즈시절이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떤 특정 지을만한 드라마틱한 리즈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아동기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시간의 연속성을 애써 구분 짓지만 그 경계는 늘 모호하며 항상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넘어가게 된다.
문득 거울을 봤는데 뒤편에 보이는 흰머리카락, 개인적으로는 흰 수염이 하나씩 올라올 때, 세월의 속도를 체감한다. 흰머리카락 한올, 얼굴의 주름 한 줄이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듯, 우리 인생의 장면들은 어떤 두드러진 경계 없이 쭉 이어지는 것이다. 단지 일련의 사건들로 하여금 그 시절을 구분 지어 기억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 기억 또한 미화되고 왜곡되기도 하며, 그 조각난 기억들과 추억들도 대부분 사진 몇 장에 의존하게 된다.
굳이 찾고 찾아 나의 리즈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사진을 꼽아 본다면, 적어도 십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 사진으로 기억을 한다. 어머님들이 “준이와 같이 사진 찍어야 한다.”며 한참을 기다렸다는 미화되고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뭐 사진으로 보아하니 어느 정도 사실로 입증이 된 것은 아닐까. 하하하. 그러나 이 리즈시절도 잠시.. 이날(13살) 이후로 20살이 되던 해까지 이성의 손 한번 잡지 못하는 암흑시절이 계속되었다. 물론 학업을 위해 의도적인 선긋기였음을 밝히며 정신승리를 해본다. 하하하.
그리고 무늬만 법대생으로 열심히 대학 생활에 심취했던 20대 중반의 기억. 이때는 취업을 위한 각종 스펙 예컨대 해외봉사, 공모전, 자격증 등등을 응시하기만 하면 척척 붙는 리즈시절이었다. 특히나 지식경제부 장관상, 과학기술부 기관장상, 학교 총장상, 외부 장학생 등등 상복이 터졌었는데, 덕분에 자신감은 변질되어 시건방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인생은 늘 파도와 같아서 오르면 오를수록 내리막도 가파른 법인데, 나는 이 사실을 잘 몰랐다. 결국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던 나새끼는 주제 파악도 못한 채 겁 없이 덤빈 일들 덕분에 지금까지 사회의 쓴맛을 보고 있다.
법대 야구부, 축구부, 조기 축구회 등등 열심히 생활체육인으로 살았던 20대 중후반은 아마 체력적으로도 리즈시절이 아니었을까.
우리들의 리즈시절은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리즈시절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형의 한 장면들 아닌가. 외모야 가는 세월에 장사 없고, 시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늙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절대 리즈 시절의 갱신은 없겠지만, 리즈시절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외모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당신의 리즈시절이 과거형일 수도 현재형일 수도 그리고 미래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생존의 위협 덕분에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고, 과거를 추억하며 도태했다는 글귀가 떠오른다.
인생의 결말을 미리 알고 시작한다면, 굳이 살아갈 이유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결말이 좋다면 좋은 대로 현실에 안주하겠고, 결말이 나쁘다면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리즈 시절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지금 보다 훨씬 더 좋은 시절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장면들은 곧 그 미래의 리즈 시절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자랑할 만한 과거의 리즈 시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좋을 리즈 시절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