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X한식문화 공모전
" 우리 쭈이(준이) 왔나?" 저기 먼발치에서부터 손을 흔들며 불편한 다리로 걸어오시는 분이 계셨다. 바로 우리 할머니다. 무릎이 안 좋으셨던 할머니께서는 불편한 걸음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손자인 나를 늘 기다리시며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과거 교통사고로 오른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셔서 의수를 꼈던 할머니의 로보캅 같은 손을 볼 때마다 나는 신기한 듯 주무르고 잡으며 할머니를 따랐다. 할머니께서 왼손잡이셨다면 좀 더 나았을 테지만, 오른손잡이셨던 할머니께서는 왼손으로 모든 일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매사에 투박할 수밖에 없었다.
명절이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할머니께서는 늘 어머니께 전화를 하셨는데, 바로 큰 손자인 내가 할머니를 뵈러 언제 부산을 오는지가 궁금하셨기 때문이다. 손자가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테고, 한편으로는 부족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손자에게 맛있는 음식 하나를 더 해먹이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시려는 마음이었을 테다.
그렇게 명절에 할머니 댁을 가면 밥상에 어김없이 올라오는 반찬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열기'라고 부르는 생선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생선을 '빨간 고기'라고 불렀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우리 가족이 할머니 댁을 가는 날, 그날 저녁에는 어김없이 빨간 고기가 밥상에 올라왔다.
할머니께서는 오른손잡이셨는데, 다친 오른손 때문에 주로 왼손으로 사용하셨다. 당연히 왼손 젓가락질이 서투르셨고, 때문에 주로 그냥 맨손을 사용하셨다. 항상 투박한 왼손으로 직접 뼈를 발라 제일 먹기 좋은 두툼한 부위를 항상 내 밥 위에 올려 주시곤 하셨다. 사실 철없이 어렸던 나는 그 빨간 고기가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할머니께서 발라주신 두툼한 부위의 고기 몇 점은 맛있게 곧잘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다 먹고 나면 흔히 말하는 빨간 고기의 '대가리'를 드셨다. 너무 옛날이야기 같지만 입맛이 없다며 물에 말아서 드시거나, 간장에 비벼 김치에 빨간 고기 대가리를 드셨다. 나는 오히려 그렇게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따라 하는 게 재미있었다. 물에 말아서 밥을 먹고, 간장에 비벼서 밥을 먹었다. 뭔가 그 어린 꼬마의 눈으로 봤을 때는 척척박사 같은 할머니만 갖고 계신 비법 레시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할머니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을 뿐,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고 나니 비로소 할머니 당신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당시 '열기'라 부르는 '빨간 고기'는 값이 싼 생선 중에 하나였다. 아마도 부족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손자와 함께 하는 저녁 밥상에 푸짐한 생선 구이를 올리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형편상 할머니께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열기'외에는 많지 았았을 것이다. 갈치, 삼치 이런 생선은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IMF 시절을 겪으면서 더 힘들어졌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할머니께 드리는 생활비로는 부족했을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명절 마지막 날에는 "우리 쭈이(준이) 서울 가면 맛있는 거 사묵으래이" 하시며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몇 장을 기어코 내 주머니 속에 넣어서 주셨다. 내심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은 채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감사합니다 할머니" 씩씩하게 외쳐댔었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 버린 할머니와 빨간 고기. 가끔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그 빨간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는데,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이 전혀 나질 않는다. 할머니의 그 투박한 손길에 담긴 사랑까지 구워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음식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소중한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그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하나의 추억이 고스란히 한 데 버무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인 거다. 따라서 존재의 부존재로 어쩔 수 없이 추억이 되어 버린 맛이 세월에 따라 옅어지는 게 속상할 때가 많다.
그 따뜻한 밥 한 공기 위에 올려진 두툼한 빨간 고기. 기름이 잔뜩 묻은 손으로 두툼한 살을 발라 주시며 웃으시는 할머니의 인자한 웃음, 웃을 때 넓어지시는 할머니의 코 평수, 따뜻한 밥상에서의 그 온기가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