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공적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내가 정의하는 나와,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나의 분리를 의미하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꺼낸 단어인데, 생각해 보면 나를 설명하는 많은 것들이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평가를 차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가. 때로는 너무 많은 가면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한때 유행했던 백문백답을 떠올려 본다. 늘 등장하는 뻔한 질문들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MBTI처럼 객관적인 수치나 답변을 통해 나를 정의하려는 시도에 관심을 갖게 된다.
“뭘 좋아하세요?”
글쎄, 나는 과연 무엇을 좋아할까?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일까? 스스로를 돌아보고 과거를 반추해 보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막상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무의식적으로 허기를 채우려 배달 앱을 켜는 날들이 많아진다. 그렇게 흘려보낸 하루를 되돌아볼 때면, 내가 웰빙과 웰다잉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참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 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면,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수밖에 없다. 직접 부딪혀 봐야만 “아, 나는 이럴 때 행복하구나.” 또는 “이런 선택이 나에게 더 잘 맞는구나.” 하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행복의 기준을 ‘성공’이 아니라 ‘시도’ 자체에 둔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에 대한 스트레스도 지금보다 덜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면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짜 나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나를 던져야 한다. 가면을 벗고, 스스로를 실험하듯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