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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Oct 30. 2020

축구보다 치열한 미국의 스트리밍 서비스 경쟁

손흥민 선수 경기를 모두 보려면 4개의 OTT 서비스에 가입해야 한다 

얼마 전 나는 아내와 함께 손흥민 선수가 소속된 토트넘 핫스퍼 Tottenham Hotspur FC 축구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었다. 세계 3대 축구선수로 박지성과 안정환, 그리고 손흥민을 꼽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아내였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Amazon Prime Video에서 제작한 본격 축구 다큐멘터리 <올 오어 나씽 All or Nothing>에 이내 매료되었다.


일곱 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의 9부작 다큐멘터리를 이틀 만에 끝낸 아내는 자신이 토트넘의 팬이 된 것 같다고 선언했다. 곧이어 그녀는 주말에 열리는 토트넘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Manchester United의 경기를 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중계권을 가진 NBC의 스트리밍 서비스 피콕 Peacock에 가입했고, 손흥민 선수가 2골 1 도움을 기록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6-1로 대파하는 것을 고화질로 감상했다.


며칠 뒤 유로파 리그 대회(UEL)에 출전한 토트넘의 경기를 보려던 아내는 새로운 스트리밍 서비스 가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UEL의 미국 내 중계권을 가진 CBS가 제공하는 CBS 올 액세스 CBS All Access에서 UEL 경기를 중계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트넘이 출전한 FA컵 경기까지 보려면 ESPN+ 스트리밍 서비스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NBC Peacock & CBS All Access


오버 더 탑 미디어 서비스 over-the-top media service, 일명 OTT로 불리는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산업은 이제 인터넷 쇼핑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서비스가 되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넷플릭스 Netflix를 필두로 앞서 언급했던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피콕, CBS 올 액세스, 슬링 티브이, 디즈니 플러스 Disney+, 훌루 Hulu, 쇼타임 Showtime, 스타즈 STARZ, 유튜브 티브이 Youtube TV, 애플 티브이 플러스 Apple TV+, 에이치비오 나우 HBO Now, 에이티앤티 나우 AT&T Now, 엠엘비 티브이 MLB.TV, 이에스피엔 플러스 ESPN+ 등 양손에 다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OTT 서비스가 비 온 뒤 대나무 새싹 올라오듯 마구 생겨나고 있다. 특히 OTT 시장에 진출한 기업들은 대부분 기존의 미디어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대형 미디어 회사들이기 때문에 엄청난 자본력을 동원해 사활을 걸고 처절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OTT 서비스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경쟁은 손흥민 선수의 경기만큼이나 흥미롭다. 각각의 서비스 사업자들이 나름의 개성을 표출하면서 시청자들의 선택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넷플릭스는 성인들이 몰입해서 볼만한 드라마를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디즈니 플러스는 스타워즈, 마블 시리즈 및 디즈니 애니메이션 팬들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라인업으로 시청자들을 유혹한다. HBO는 특유의 깊이 있는 연출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올해 7월 15일부터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한 피콕이 서둘러 EPL 경기 중계를 편성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차별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유료 구독자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신규 콘텐츠 개발은 매우 어렵다.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같은 초대형 히트 상품을 매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주 새로운 콘텐츠를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스포츠 중계, 특히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EPL 같은 인기 리그 중계는 OTT 서비스가 눈독을 들일만한 콘텐츠이다. 특히 스포츠 중계는 생방송으로 볼 때 가장 가치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유료 가입을 망설이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은 콘텐츠는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토트넘이 2020-2021 시즌에 치르는 모든 경기의 중계권은 NBC, CBS, ESPN 3사가 네 개의 스트리밍 서비스에 나누어 송출하고 있다 (NBC는 피콕과 NBCSN으로 나누어 중계한다). 토트넘 다큐멘터리까지 셈에 넣으면 한 명의 토트넘 열혈 팬이 최대 다섯 개의 스트리밍 서비스까지도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치열한 콘텐츠 확보 경쟁은 시장의 크기를 엄청나게 키우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청자들의 선택의 폭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OTT가 이토록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 전 시대에는 EPL 전 경기를 미국에서 시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정된 케이블 채널에서 미식축구나 야구 등 다른 스포츠를 중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에 방송사들은 EPL 중계를 굳이 편성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었다. 물론 미국 내 축구 팬이 늘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여전히 미국에는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축구의 인기를 앞서는 스포츠가 다수 있기 때문에 EPL 전 경기 편성은 OTT 서비스의 시대가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불가능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청자들이 과도한 선택지로 인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초이스 오버로드 choice overload라고도 불리는 선택지 과포화 상태는 구매자의 구매 의욕을 저하시키고 피로감을 키운다. 넷플릭스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서비스만 가입해도 너무나 많은 볼거리가 있는데, 축구 중계 때문에 무리해서 피콕과 CBS 올 액세스에 가입하고 나면 도저히 다른 서비스는 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무리 재미있는 쇼가 새로운 채널에 등장해도 여간해서는 힘을 내어 가입하기 어렵게 된다. 시청자에게 어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OTT 서비스 사업자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쇼를 놓치는 시청자에게도 불행하고 혼란스러운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 이 불행한 시장의 첫 번째 희생자가 결정되었다.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퀴비 Quibi라는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생 OTT 서비스였다. 2018년에 설립된 퀴비는 약 20개월 만인 지난 2020년 4월 OTT 서비스를 시작했다. 모바일 시대에 걸맞은 서비스를 표방하며 에피소드 당 10분 내외의 짧은 드라마와 쇼를 야심 차게 선보인 퀴비는 단 6개월 만인 2020년 10월 충격적인 폐업 소식을 발표했다. 서비스 종료는 2020년 12월로 예정되어 있다.


OTT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 퀴비 Image captured from quibi.com


대부분의 사람들은 퀴비라는 서비스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오죽하면 연예 매체 벌쳐 Vulture는 몇 달 전 ‘누구 퀴비 보는 사람 있니? Is anyone watching Quibi?’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그리고 라이온 킹을 제작한 전설의 디즈니 출신 프로듀서 제프리 카젠버그 Jeffrey Katzenberg가 설립한 퀴비는 멕 휘트먼 Meg Whitman이라는 헐리웃 및 실리콘 밸리 출신의 거물 CEO를 영업하고 2조 원 가까운 금액을 투자받았지만 정작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퀴비의 서비스 종료 발표 후, 수많은 분석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테크 뉴스 미디어 더버지 The Verge는 퀴비가 망한 열한 가지 이유를 기사로 쓰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사업 환경이 악화된 것이 주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퀴비가 망한 이유는 차별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퀴비의 쇼들은 대부분 ‘그다지 재미없었다’고 한다. 또한 퀴비 스스로 차별화 포인트라고 내세웠던 10분 내외의 짧은 쇼는 이미 유튜브에서 무료로 차고 넘치도록 제공하는 탓에 사실 딱히 차별점도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퀴비의 사례를 보면 다시 한번 초이스 오버로드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다. EPL 중계처럼 팬덤을 이미 확보한 콘텐츠가 아니라면 시청자들은 더 이상 새로운 서비스에 큰 관심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금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OTT 서비스들은 기존의 서비스들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퀴비처럼 2조 원을 쓰고도 바로 이 기본을 지키지 못해 망한 회사가 있는 것을 보면 한 번쯤 더 생각해볼 일이다.


EPL이라는 킬러 콘텐츠를 인질로 잡고 스트리밍과 케이블 동시 가입을 강요하는 NBC도 하루빨리 자신들만의 고유 콘텐츠를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스포츠들이 방송사를 통한 중계권 판매가 아닌 OTT 서비스 론칭을 통한 콘텐츠 직접 전달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PL의 경우 이르면 2022년 넷플릭스 스타일의 축구 OTT 서비스 개시를 목표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NBC의 축구 중계 꼼수가 더는 통하지 않는 날이 곧 올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OTT 시장이 걸음마 단계라 혼란 그 자체이다. 누가 성공할지 어떤 콘텐츠가 살아남을지 전문가들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마치 프로레슬링 태그 매치를 보듯 수많은 사업자들이 엉켜서 각축을 벌이는 모습만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부디 사업자와 시청자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적절한 시장이 조만간 형성되어 주말마다 손흥민 선수와 모든 경기에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Cover photo by Tim Bechervais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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