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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Nov 16. 2020

백조가 살고 있는 뒷골목

맨해튼 미드타운의 어느 지저분한 골목을 지나던 우리는 비명인지 절규인지 알 수 없는 쇳소리에 흠칫 놀라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났는지 헝클어진 긴 백발 머리의 노숙자가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목에는 팻말이 걸려 있었는데 글씨가 너무 작은 탓에 길 건너에서는 읽을 수가 없었다.


“어머, 매튜 본 Matthew Bourne 백조의 호수네!


순간 옆에 서 있던 아내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노숙자 뒤의 건물을 가리켰다. 과연 그 건물에는 <매튜 본 연출, 백조의 호수>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개성 없는 허름한 사무실 건물들 사이에 빼꼼히 자리 잡은 작은 공연장이었지만 발레를 좋아하는 아내의 눈을 피해가진 못했던 것이다.


오래전 막을 내린 줄 알았던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가 아직도 뉴욕 한가운데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무척 기뻤다. 브로드웨이도 아닌 미드타운 동쪽의 어느 후미진 골목이었지만 우리는 망설임 없이 표를 두 장 구매했다. 추운 평일 저녁에 관객이 없기 때문인지 티켓도 한 장에 이십 달러밖에 하지 않았다. 어쩌면 공연 직전에 남은 표를 폭탄 세일로 처분하는 운 좋은 경우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뉴욕의 진정한 매력은 이런 숨은 진주 같은 순간들에서 나온다면서 우리는 흥에 겨워 조잘거렸다.


공연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관계로 우리는 바로 옆 핫도그 가게에서 대충 배를 채우고 서둘러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대학로 소극장을 연상시켰다. 공연장은 의외로 큰 편이었는데, 일반적인 대학로 소극장의 네다섯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 좌석은 이층이었다. 그 새 표도 많이 팔았는지 관객들도 거의 꽉 찬 상태였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그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가 은은하게 공연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많아서인지 웃고 떠들거나 휘파람을 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매튜 본 작품을 본다는 사실에 우리는 기대에 차 있었다.


불이 꺼지고  <백조의 호수>가 은은하게 공연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Photo by Fabio Jock on Unsplash


공연이 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 나는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경부고속도로 주차장 옆, 트로트가 나오는 스피커 앞에서 페루 밴드가 연주하는 남미 음악 공연도 즐기는 나로서는 좀 의외였다. 내가 발레를 너무 몰라서 그런가, 아니면 좀 피곤해서 집중이 안되는 것일까.


매튜 본이 연출한 <백조의 호수>가 특히 유명한 이유는 그가 기존의 관념을 깨고 전원 남성을 백조로 캐스팅한 파격 연출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가녀린 여성 무용수 대신, 전신의 탄탄한 잔근육이 매력적인 남성 무용수들을 백조로 세운 시도는 초연 당시에는 굉장한 파격이었을 것이다. 혹시 아리따운 여성 백조가 아니라 내가 집중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하던 차에 옆에서 하품을 하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웃통 벗은 근육질 남성들이 눈 앞에서 뛰어다니고 있는데 하품이라니,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박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던 국립 발레단 공연의 기억을 더듬어 봤을 때, 이들의 움직임은 조금 둔해 보였다. 박자가 조금 안 맞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홀로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옆에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봤어? 저기 양쪽 끝에 백조 두 마리. 저기 봐봐!”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본 순간 나는 그만 ‘푸훕’ 하면서 짧은 폭소를 뿜고 말았다. 그곳에는 백조 두 마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었는데, 그들은 추위라도 타는지 살벌하게 떨고 있었다. 쓸데없이 우람한 상체에 비해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는 하체가 강렬한 시각적 대비를 이루는 중이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 <유머 일번지>에서 봤던 숭구리당당 개다리춤이 떠올라, 나는 더 이상 웃음이 제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덩달아 아내도 웃음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는 두툼한 파카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거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대체 무용수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전문 발레리노들 치고는 상하체 근육들이 너무 발달해 있었다. 마치 연출가가 어느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발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온 것 같았다. 입구에서 나누어 준 팸플릿을 반사된 조명 빛에 의지해 더듬고 있는데 문득 작은 글씨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본 공연에는 오케스트라가 없습니다. 음악은 라이브가 아닌 녹음입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레와 뮤지컬 공연을 보는데 현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는 경우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로소 공연이 시작했을 때 느껴졌던 어떤 이질감 혹은 석연찮은 느낌이 바로 녹음된 음악 소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이 공연이 왜 이렇게 저렴했는지 점차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공연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추위에 떠는 백조들은 늘어만 갔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에 이르자 무대 양 끝의 우람한 백조 네 마리가 함께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혹시 저게 춤의 일부인가 싶을 정도였다. 저렇게 엉망으로 공연을 하고 출연료는 꼬박꼬박 받겠지 생각하자 약이 올랐다. 일어나 나가고 싶었지만 좌석이 줄 한가운데인 탓에 움직일 수도 없었던 우리는 마지막 커튼콜까지 다 보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자 유난히 찬 공기가 골목으로 불어닥쳤다. 한기에 재킷의 지퍼를 올리는데 어디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에 팻말을 걸고 악을 쓰던 노숙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직도 공연장 앞에서 외침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위에 백발 머리가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있었다. 강한 동유럽 억양과 흥분한 목소리가 바람에 한데 섞여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우리는 관심 없는 척 슬며시 그의 옆을 지나며 목에 걸린 푯말을 살펴보았다.


XX 공연 기획사는 지난 20XX 년 매튜 본 <백조의 호수> 공연을 시작한 뒤, 모든 공연 일정이 종료될 때까지 우리 연주자들을 고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공연 기획사는 연주자들에게 <백조의 호수> 음악 전곡을 녹음하도록 한 다음, 일방적으로 우리 모두를 해고했습니다. 관객 여러분이 극장에 들어가서 듣게 될 음악은 저질 녹음테이프이며 진정한 라이브 음악이 아닙니다. 우리 연주자들과 함께 서서 공연을 보이콧해주세요.


순간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 사람은 미친 사람도, 노숙자도 아니었다. 부당한 계약으로 음악을 녹음해주고 일자리를 잃은 분노한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다. 덩달아 너절해 보이던 그의 산발 머리도 경험이 풍부한 예술가의 혼이 깃든 백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 시간 전 우리가 키득거리면서 핫도그 케첩이 묻은 입으로 공연장에 들어가던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바람이 얼음장 같다며 지하철 역을 향해 잰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하철 안은 조용했다. 바보 같이 마이크도 없이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던 백발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눈에 아른거렸다. 백조들이 출연료는 제대로 받고 있을지 궁금했다. 저렇게 일방적으로 오케스트라를 해고하고 돈만 챙기는 기획사인데, 배우들이라고 좋은 대우를 해줄 리 만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낮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뛰고 저녁에 부랴부랴 극장으로 달려와 백조가 되는 건 아닐까.


엉터리 공연에 바가지를 쓴 관객들, 소리 지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던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우람한 근육에도 불구하고 후들거릴 수밖에 없었던 백조들까지,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킹 오브 코미디 The King of Comedy>와 <비열한 거리 Mean Streets> 중간 어디쯤의 세계를 구경하고 온 것 같았다. 싸구려 아이리시 위스키 Irish Whiskey와 짜디짠 감자튀김이 어울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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