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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Nov 10. 2020

안 사서 죄송합니다

결국 집 못 산 이야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는 호돌이 문방구와 삐삐 문방구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호돌이 문방구는 서울 올림픽의 기운을 타고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삐삐 문방구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가게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던 삐삐 문방구 사장님 얼굴에는 항상 근심이 가득했다. 웃자란 수염과 팔자 주름, 항상 화가 난 듯한 표정 때문에 40대 중반의 사장님은 나이보다 열 살쯤 더 들어 보였다.


“이놈들아, 안 살 거면 만지작거리지 마!”


삐삐 문방구 사장님은 아이들이 호빵이나 과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버럭 화를 내곤 했다. 아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가게를 나와 호돌이 문방구로 향하기 일쑤였다.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사지 않을 물건을 만지는 행위는 물건 주인을 화나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워나갔다.


마지막으로 뵌 지 이십 년이 지난 삐삐 문방구 사장님이 문득 생각난 순간은 집을 사려고 구매 계약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헤븐리 힐스 Heavenly Hills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닌 지 두 달만에 비로소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은 우리 부부는 재빨리 오퍼(구매 제안서)를 넣었다.


본격적인 계약에 앞서 집의 상태를 점검한 결과 몇 가지 문제들이 발견되었다. 화장실 변기와 바닥 이음새에서 물이 조금 새고 있었고, 단열이 되지 않는 망가진 유리창 두 장도 교체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사용 연한을 훌쩍 넘긴 온수기와 시스템 에에컨 등도 교체가 시급했다. 견적을 내 본 결과 모두 수리하는데 대략 오백만 원 정도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리는 집주인에게 위의 문제를 고쳐주거나 오백만 원을 집 값에서 할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엌 문고리가 빠지는 문제나 벽장 문이 잘 닫히지 않는 등 사소한 문제들은 우리가 처리하기로 했다.


다음 날 부동산을 통해 집주인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놀라웠다. 딱 잘라,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변 시세보다 이십 퍼센트 정도 비싼 가격을 제시한 우리는 유리창 수리비조차 주지 않겠다는 말에 무척 실망했다.


금요일 저녁에 연락을 받았던 우리는 다음 주 월요일까지 답변을 주겠다고 한 뒤 장고에 들어갔다. 비싼 가격 외에도 오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공항도 사실 문제였다. 이착륙 루트 바로 아래 집이 자리 잡고 있어 특히 비행기 소음이 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집과 사랑에 빠져 모든 허물을 감싸주려던 생각은 집주인의 으름장 앞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계약금을 포기하고 구매 제안을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토요일 아침이 되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집주인이 창문과 화장실 수리 비용으로 백만 원을 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이미 이 거래에 대해 마음이 차갑게 식은 우리는 형식적으로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헤븐리 힐스 같은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일요일 오전은 교회에 가는 시간이다. 모든 상점은 일요일에 문을 닫거나 열두 시가 넘은 오후부터 문을 연다. 그런 의미에서 일요일 아침 아홉 시에 부동산으로부터 온 전화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집주인이 우리가 원하는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주는 의미로 사백만 원을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집주인의 태도가 이틀 만에 이렇게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중개인은 집주인이 다음 주에 이사 가는 집의 잔금을 치러야 하는 관계로 집을 빨리 팔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내일까지 답을 주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집을 살 것인지 다시 한번 심사숙고했지만 결론은 역시 계약 파기였다. 아내는 이미 공항 소음 때문에 마음이 떠난 상태였고, 나 역시도 이십 퍼센트나 웃돈을 주고 이 집을 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월요일 아침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우리의 계약금도 함께 날아갔다.


계약금이  날아가는 모습. Photo by Chris Liverani on Unsplash


사람들은 보통 착하다. 대부분 타인을 해하는 것을 꺼리고 돕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 판매자가 급히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집을 안 샀다는 이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빠, 그래서 말인데, 너무 마음이 불편해.”


아내는 이런 불편한 마음을 전화로 장인어른께 털어놓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듣고 계시던 장인어른께서 한 마디 툭 던지셨다.


“그건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계약금 떼이고라도 안 산다는데, 그렇게 손님이 떠나면 파는 사람이 반성해야지. 왜 손님이 떠났을까, 다음에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야.”


별안간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우리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구나. 우리는 덜컥 큰 계약금을 걸었다가 돈을 잃었고, 집주인은 비싼 값에 집을 팔려다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너무도 당연한 결론인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집주인이 이사를 가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던 나는 문득 삐삐 문방구 사장님이 떠올랐다. 안 살 거면 호빵을 만지작거리지 말라며 화를 내던 문방구 사장님 덕분에 나는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를 내며 초등학생 손님들을 호돌이 문방구로 내몰았던 삐삐 문방구 사장님과 배짱을 부리다 잠재 구매자의 발길을 돌리게 한 집주인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래는 서로에게 유익하다.
Transactions are mutually beneficial.


거래는 서로에게 유익하다. 경영학 개론 수업 첫 번째 시간에 배우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명제 같지만 사실 이 문장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거래는 서로에게 유익할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유익한 거래만이 양측의 합의에 의해 완결되어 ‘거래’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십 년간 크고 작은 거래와 협상이 오고 가는 세상에 살아왔지만, 이렇게 거래의 의미가 원초적으로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분간 집을 사려는 노력은 접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알아챈 아내가 돌아누우며 조용히 말했다.


“모든 체스 말들은 최선을 다 했어. 결과가 이것일 뿐이야.”




덧붙이자면, 그 집은 두 달 후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판매자는 우리가 제시한 가격보다 이십 퍼센트 낮은 가격에 집을 팔았다. 집 근처 공항에는 새로운 페덱스 FeDex 화물기 노선이 추가되었고, 공항은 활주로 공사 및 확장 계획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집을 사려던 계획을 포기했고, 당분간 아파트 월세 살이에 만족하기로 했다. 헤븐리 힐스의 집값은 늦여름에 정점을 찍은 뒤 조금씩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집 구매에 관한 첫 번째 에피소드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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