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를 한 다는 것
타자에게 100% 공감할 수 있는 생물이 있을까요. 이번 #참사 를 보며 추모를 호소한다느니 또 누구는 유난을 떤다느니 다름과 공감에 대한 의견 차이에 불편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애도와 공감은 분명 단어 차이만큼이나 다르게 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애도에는 공감이 필요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에 작게 공감하는 사람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의 정도도 방식도 다 조금씩 다르겠지요.
분명 사회가 애도를 강요하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사회이지 않나요. 다들 조금씩 만족하지 못하는 규범과 규칙 속에서 참기도 하고 양보도 하며 양적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게 곧 최고가 아닌 최선이라는 민주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신형철 평론가 책의 글을 들고 와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정한 애도가 있을 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역사>
분인이라는 건 곧 관계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오며 마주치고 만나는 관계, 그것이 곧 사랑이고 그것은 곧 자애이기에 두 번 다시 그 관계를 접하지 못한다는 공허와 상실감을 공감할 때 애도가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부디 ‘내 일도 아닌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 같은 생각에 기반한 언사나 생각이 발화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