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네 그음식4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정확하지는 않다. 그 즈음이었다. 한 친구가 봉지를 '탈탈탈' 흔들며 나타났다. 놀던 아이들이 그 소리에 이끌려 몸을 돌렸다. 한참 봉지를 흔들던 친구가 동작을 멈췄다. 쳐다보던 눈들이 모두 봉지 입구로 향했다.
친구가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에게 한 조각씩 나눠줬다. 아이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까드득' 깨물었다. 나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얼마나 맛있던지. 생라면이었다. 스프를 뿌린 생라면. 그 아이는 그 뒤에도 몇 번 더 봉지를 '탈탈탈' 흔들며 나타났고, 아이들은 배급이라도 받는 것처럼 줄을 섰다.
친구가 준 생라면은 맛있었지만 여운이 오묘했다. 더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달리 한 조각은 너무나 빨리 사라졌다. 기쁨은 너무 짧았고, 더 먹고 싶다는 욕구는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그 뒤 결심했다. 라면을 사서 나 혼자 다 부셔서 먹으리라.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라면은 정말 어쩌다 먹는 음식이었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별식이었다. 그걸 과자처럼 먹어도 되나 하는 의문과 끓여서 먹지 않아도 되는 의문이 남았다. 어머니한테 말하지 않고 먹어도 되는지도 알쏭달쏭했다.
집에서 먹는 건 꺼림칙했고 길에서 먹다가 들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대략난감이었다. 더 먹고 싶은 욕망은 가득했으나 실현시킬 방안이 마땅치 않았다. 해를 넘겨 기회가 생겼다. 한 친구가 '소림사3'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에 3.15회관에서 소림사 한다더라. 끝내주게 재밌단다. 보러 가자. 그거 안보면 손해다."
극장은 깜깜한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생라면을 먹기에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 나는 생라면 하나를 챙겼다. 정확히 어떤 생라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 당시 청보라면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삼양이나 농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청보라면이었을 수도 있다.
우린 제일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제일 앞줄은 가리는 게 없었다. 영화를 보기에 좋았다. 게다가 라면을 먹기엔 앞에 사람이 없는 게 좋았다. 영화 시작전 어둠과 고요가 공간을 지배했다.
영화 시작전 생라면을 먹기 위해선 간단한 조리(?)를 해야 했다. 봉지를 뜯었다. 스프를 뜯어서 넣었다. 흔들었다. 헉. 그 순간 생라면 흔드는 소리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
영화가 시작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영화가 곧 시작될 기세라 열심히 흔들었다. 이 때 뒤에서 어떤 표정들이었을까. 다 흔들자 한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생라면 조각 하나를 달라는 신호였다.
"안돼, 생라면은 영화 시작되고 나면 먹는 거야. 그때까지 참아."
단호했다. 우리는 영화를 기다렸다. 생라면 시식도 기다리면서. 영화가 시작되자 우리는 서둘러 생라면 조각을 하나씩 입에 물고 깨물었다. '까득'.
우린 그 순간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소리가 너무 컸다. 당황스러웠다. 이러면 곤란한데. 잠시 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액션이 시작됐다. 우린 서둘러 생라면 조각을 깨물어 삼켰다.
무협영화라는 특성상 끊임없이 액션이 이어질 거라 기대했다. 그건 그야말로 무지였다. 영화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인물을 소개하고, 갈등을 제시하고, 갈등을 쌓는 과정이 쭉 이어진다. 전반부 액션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영화에 집중해서 놓치기도 했지만 생라면을 먹을 시간이 좀체 나오지 않았다. 생라면을 씹을 때라고 생각해서 입에 넣었다, 금세 조용해져 입에 물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긴 강이 나왔다. 본격 액션이 시작됐다. 20분 정도 쭉 액션이 이어졌다. 우리는 신나게 생라면 조각을 씹었다. '슉슉' '빠삭빠삭' '슉슉슉' '빠삭빠삭빠삭' 이연걸과 주인공 패거리들이 열심히 손과 발을 쓰는 동안 우리도 열심히 손과 입을 움직였다.
영화속 주인공들의 합도 훌륭했지만 우리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영화관을 나서며 우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영화 너무 재밌었다. 또 보러 오자."
긴 세월이 흘러 영화 전반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 후반부, 긴 강과 배 위에서의 격투신, 장대를 이용한 화려한 액션은 기억이 선명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엔 생라면을 먹느라, 먹을 타이밍을 재느라 영화에 집중하지 못해서였을까. 마지막 액션 장면엔 소음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생라면을 씹어서 내용이 잘 기억나는 것일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영화는 정말 재밌었고, 그 때 생라면도 참 맛있었다. 그럴 날이 또 올까. 그럴 날이 또 오진 않겠지만 기억 속 영화관에선 지금도 제일 앞자리에서 열심히 생라면 조각을 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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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보식품은 1984년 설립했고 1987년 파산했다. 청보식품에서 라면을 만들었고, 청보라면은 파산 이후 오뚜기라면으로 이어진다.
※ 마산 3.15극장. 1962년 3.15의거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인기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1992년 10월 이후 휴관, 방치 상태.
※ 영화 소림사3-남북소림은 1986년 2월 1일 개봉했다. 소림사 시리즈는 이연걸 주연으로 1, 2가 이미 대히트를 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