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될까

우리 동네 전설 : 예천·안동편5 삼강주막

by 이야기보따리

2004년 예천에 있는 한 조용한 시골집에 예천군 공무원들이 찾아왔다. 아흔을 바라보던 주인 할머니는 뭔 일인가 싶었다. 공무원들은 시골집을 문화재로 지정하겠다 했다. 주인 할머니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예천군은 주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경북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다. 그해 12월 경북도는 현지조사를 나왔다. 과연 문화재가 될 만한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주인 할머니의 표정은 역시 별 변화가 없었다. 1917년 10월 20일 생인 할머니는 그 때 나이가 88세였다. “이제 나이가 아흔인데 문화재 지정이 돼 봤자지...”


경북 예천군 삼강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쳐져 붙은 이름이다.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소금배가 짐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다. 잔뜩 짐을 진 보부상들이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도 들렀다. 강을 따라 짐을 나르고, 서울까지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찾는 짐꾼들에게 삼강은 교통 요충지였다.


삼강 주변엔 주막이 여러개였고, 삼강주막도 그 중 하나였다. 1934년 경술홍수 때 주변이 큰 피해를 입었다. 강변에 있던 집 27채가 떠내려갔다. 27채 가운데 주막이 2채였다. 대홍수 이후 둑을 쌓고 정비했다.

20220226_172406.jpg 삼강주막 앞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쳐진다. 강이 세 개라서 '삼강'이고 '삼강' 앞에 있어 이름이 '삼강주막'이다.


어느덧 곳곳에 신작로가 생기고 차와 기차가 다니면서 뱃길이 뜸해졌다. 삼강엔 소금배가 사라졌다. 소금은 배 대신 차나 경운기로 실어날랐다. 강을 오고가던 나룻배도 사라졌다. 소금배가 사라지고, 보부상이 사라진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차지했다.


삼강은 강이 깊지 않았다. 때때로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깊이가 얕아졌다. 걸어서 강 건너로 가는 사람들은 삼강주막에서 목을 축이고 기운을 채운 뒤 건넜다. 그런 사람들이 한동안 주막을 찾았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불 붙으면서 삼강주막을 찾는 사람들은 더욱 줄었다. 볏짚을 얹었던 삼강주막 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유옥련 할머니가 주막을 운영한 지도 이제 벌써 20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동안 세상은 현기증 날 정도로 바뀌는 중이었다.


이 시기 주막은 마지막 숨을 겨우 쉬는 상태였다. 1974년 3월 영동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대관령 40리길 가운데 있는 주막을 철거한다. 반쟁이(半程의 강원도 사투리)집이라 불린 주막이었다. 대관령 고개에서 길을 잃거나 눈에 갇혀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이병화라는 사람이 개인돈으로 차린 주막이었다.


반쟁이집이 허물어지는 걸 사람들은 이젠 영영 못보는 이를 보내는 것처럼 이별인사를 건넸다. 당시 주막에 대한 인식은 그랬다. 삼강주막이 이때 문을 닫았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유옥련 할머니가 원래부터 주막을 하게 된 건 아니었다. 할머니는 1932년 결혼한다. 겨우 16살 때였다. 남편은 4살 위인 뱃사공이었다. 일제강점기를 힘겹게 버티고 나자 곧 큰 전쟁이 터진다. 전쟁 직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남편이 떠난 빈 자리는 컸다. 자식도 여럿이었다. 농사로만 자식을 다 먹여살릴 수 없었다.


마침 주막을 하던 전 주인이 마을을 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주막을 인수하면서 주모가 됐다. 주모와 농사일, 투잡을 뛰며 가족을 먹여살렸다. 그렇게 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살아내고 어느덧 2004년이 됐다. 세상에 ‘주막’은 사라진 존재였다.


대도시나 민속촌에 ‘주막’이란 간판이 걸린 곳들이 있었지만 술을 파는 주점을 고풍스럽게 지은 이름일 뿐이었다. 장터나 큰고개, 나루터, 간선도로변에서 밥과 숙식을 제공하는 전통이 이어진 곳은 이제 삼강주막 한 곳 뿐이었다. 물론 어느덧 삼강주막도 숙박 기능은 사라지고 동네 사랑방 역할만 하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할머니는 관리가 힘든 막걸리 대신 소주와 맥주를 팔았다. 반찬은 밭에 있는 풀 아무거나 뽑아서 나물로 무쳐서 내놨다. 반찬은 대부분 소금이었고, 멸치와 콩자반이 종종 등장했다. 손님이 요구해서 매운탕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경우였다.


삼강주막은 이름만 주막일 뿐 동네 노인들이 나와서 술 한 잔하는 점방이었다. 하지만 그 노인들 덕분에 주막은 간판을 내리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었다. 장성한 자식들은 어머니를 모셔가려 했다. 할머니는 거부했다.

"아들, 딸네 집에 가 있어도 여기만큼 편하지 않아."(YTN, 2003.10.7.)


삶이 풍요로워지고 과거 흔적이 너무나 빠르게 지워질 때 문득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다. 마지막 주막과 주모가 예천에 살고 있었다. 전화와 상수도도 없는 집이었다. 흉내 내서 급조한 주막이 아니라 이미 역사가 100년이 넘은 주막이란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주막은 오랜 역사를 담고 있었다. 주막 벽엔 그어진 금은 외상장부였다.

20250816_150522.jpg 삼강주막은 이제 흙을 밟으며 가볍게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다.


할머니는 글자를 몰랐다. 대신 금을 그어서 외상을 표시했다. 한잔 마시면 짧은 금, 한 주전자면 긴 금을 세로로 그었다. 외상값을 갚으면 옆으로 금을 길게 그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반년에 한 번씩 외상을 갚았다. 길게 1년에 한 번씩 갚는 이도 있었다. 삼강주막은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마지막 주모 또한 살아있는 역사책이었다. 할머니 기억 속에는 소금과 각종 잡화를 싣고 나르던 나룻배, 머리 위까지 쌓아올린 짐을 ‘낑낑’ 짊어지고 찾아오던 보부상,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 강을 건너던 사람들이 또렷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문화재를 지정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기엔 할머니 나이가 너무 많았다. 할머니의 남은 생에 비해 공무원들의 작업 속도는 더뎠다. 역사학자들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할머니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삼강주막을 찾았다.


2005년 10월 1일 이 시대 마지막 주모인 유옥련이 세상을 떠났다. 두 달 뒤인 12월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이 됐다. 유옥련 할머니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지정을 보질 못했다.


2007년 1월 16일 경북도는 2009년까지 12억원을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2008년 집을 해체에 재구성했다. 슬레이트로 덮여있던 지붕 대신 초가 지붕으로 바꾸었다. 삼강주막은 삼강리 주민들 공동 운영 체제로 이어가기로 했다. 동네 주민 중 두 사람을 주모로 선발했다.


한차례 소동도 벌어졌다. 2010년 대구에 사는 임모씨가 삼강나루 명칭을 전통주 상표로 사용하겠다며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낸 것이다. 예천군은 발칵 뒤집혔다. 군에서 야심차게 추진중인 삼강주막 관광지화 사업에 큰 차질이 나게 생긴 것. 삼강주막 명칭을 쓸 수 없는 삼강주막 관광지는 바퀴 없는 자동차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이제 삼강주막의 온전한 형태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1956년 영화 ‘벼락감투’(감독 홍일명)에 남았을 뿐이다. 건물은 제 모습을 잃었지만 여전히 귀한 역사가 존재했다. 부엌 흙벽에는 외상장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엌에 난 4개 문도 과거 주막 구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주막 주변엔 130여년 역사 지닌 동제(洞祭)가 여전하다. '동신계책'이라는 문서가 ‘동제’의 역사를 전한다. 나루터 운영 기록 또한 ‘삼강도선계’가 증명한다.


주막이라는 곳을 둘러싼 주변 문화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삼강주막은 기대 이상으로 많이 품고 있다. 2025년 12월 26일 삼강주막은 마침내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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