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품 판 나라, 신부가 '어퍼컷'을 날리다

<8살 아이가 듣는 우리동네 전설 : 예천·안동 편4> 두봉 신부

by 이야기보따리

"첫째야. 가게에서 불량 물건을 팔면 어떻게 해야 돼."

"바꿔달라 해야죠."

"나라가 불량 물건을 팔면?"

"나라가 불량 물건을 어떻게 팔아요."


그런 일이 벌어졌다. 1978년 영양군청과 농협이 씨감자 50kg 1포당 8000원에 팔았다. 일본 도입종 씨감자인 ‘시마바라’였다. 군청과 농협 말을 믿고 산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열심히 씨감자를 심었다. 시간이 지났다. 싹이 나올 때가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왜 이렇지. 옆집에서도 웅성웅성, 건너편 집도 웅성웅성이다.


가톨릭농민회 오원춘이 34개 농가와 함께 ‘청기면 감자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군청에 찾아가 따지고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싹이 나지 않은 건 사실. 한 해 농사를 망친 것도 사실. 정부는 찾아온 농민들에게 피해를 보상했다. 문제는 피해를 본 농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 이와 유사한 사례도 곳곳에 있었다는 것.

오원춘은 각지를 찾아다니며 강연을 시작했다. 어떻게 피해를 요구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노하우를 전했다. 정부가 벌인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속을 앓던 농민들이 반응을 보였다. 지금껏 정부가 잘못해도 더 큰 피해를 입을까 전전긍긍하며 넘어가던 농민들이었다. 이젠 달랐다. 승리 사례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을 정부가 눈치를 챘다. 1979년 모내기로 가장 바쁠 시기 오원춘이 갑자기 사라졌다. 누구도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5월 21일 오원춘이 도깨비처럼 나타났다. 왜 사라졌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누구도 몰랐다. 오원춘은 집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6월 13일 오원춘은 가톨릭 영양본당 정희욱 신부를 찾아간다. 기관원들에게 납치돼 포항과 울릉도에 끌려다니며 정신없이 폭행당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사건의 서막이 올랐다.


안동교구 주교는 프랑스인 두봉 신부였다. 당시 가톨릭은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며 유신정권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두봉 신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세고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1929년 9월 프랑스에서 태어난 두봉은 10-20대를 독일 치하에서 보냈다. 1944년엔 고향땅이 대규모 폭격으로 폐허가 되는 걸 지켜봤다. 두봉은 신학교를 다니며 노동사제를 꿈꿨다. 공산주의자들이 일하지 않는 신부들을 ‘해로운 존재’라며 공격하던 시절이었다.

KakaoTalk_20260215_163457608.jpg 두봉 신부 자서전 '가장 멋진 삶'

두봉은 ‘노동자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평일에 일하고 토.일요일 본당에서 사목하는 노동사제를 몇몇 사제들과 함께 만들었다.


지도신부는 ‘공산당 주장에 나도 모르게 젖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두봉은 일리 있다고 판단했다. 노동사제를 포기하고 선교사제로 방향을 튼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서 한국 파견이 결정된다.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멀고 가난한 나라였다.


두봉은 그런 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게 돼 기쁘고 감사했다. 친구가 유엔군으로 파견돼 전사한 나라이기도 했다. 한국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프랑스, 이집트, 스리랑카, 싱가포르, 베트남, 홍콩, 일본을 거쳐 꼬박 두 달 만에 도착했다.


처음에 도착한 곳은 대전. 본 이름인 René Marie Albert Dupont(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을 한국인들은 부르기 힘들어했다. 한국인들을 위해 ”편하게 두봉으로 부르라“ 했다. 대전교구에서 그 유명한 성심당과도 일했다.


1969년 천주교 안동교구가 세워진다. 초대교구장에 두봉이 임명됐다. 두봉은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 10년간 교구 자립기반만 닦고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유학 역사가 오래된 안동 사람들은 고집스럽고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두봉은 그런 안동 사람들이 좋았다.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다."


안동 사람들에 대한 두봉의 평가다. 두봉은 한국 가톨릭에서 가장 진보적인 의견을 펼쳤다. 1972년 한국가톨릭주교회의에서 기혼자 사목활동 기회부여 문제를 제기하자 회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더불어 JOC(가톨릭노동청년회)를 이끌며 가톨릭교회의 산업선교 활동을 지원했다.


지역에선 가톨릭농민회를 세우고, 농민회관을 건립했다. 지역 어촌민들을 위해 해성협업회를 만들었다. 상지전문대학(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다미안의원(한센병 환자)를 세우는데 큰 힘을 보탰다. 지역민들 곁에서 힘이 돼주고자 하던 두봉의 귀에 오원춘이 당한 사건이 들려왔다.


두봉이 조사한 결과 오원춘이 큰 피해를 입었고, 정부가 입막음을 시도했음이 분명했다. 천주교 안동교구 신부들이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란 문건을 제작했다. 7월 1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전국에 이 사건을 폭로한다. 같은 시기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이재오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안동에 내려온다.


안동은 이제 태풍의 눈이 돼버렸다. 8월 6일 안동교구 성당에서 기도회가 열린다. 두봉 주교를 비롯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등 사제 120여명, 가톨릭농민회원 600여명이 모였다.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올려서 안동시민들이 다 들을 수 있게 시국강연을 펼쳤다. 김수환 추기경이 1951년 첫 부임한 사목지 또한 안동본당이었다.


기도회 이후 참가자들은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안동시청 분수대까지 행진한다. 구속자 석방, 농민운동 탄압 금지,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철폐 구호를 외쳤다. 안동에 벌어진 첫 촛불시위가 이날 펼쳐진다. 시위를 마친 이들은 안동성당에서 무기한 항의 농성에 들어간다. 8월 20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1만명이 모여 기도회를 연다. 전국 최대 기도회였다.


농민들이 움직였고, 신부들이 움직였고,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신시절 정부 기관들은 자기들이 잘하는 방식대로 움직였다. 8월 10일 경북도경찰청은 오원춘 납치설 진상결과를 발표한다.


▲오원춘은 5월 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지를 혼자 여행했다 ▲오원춘이 거짓말한 이유는 처자가 있는 몸으로 영양의 한 다방에 있는 이모양(19)과 관계를 가져서다. 신부에게 고백하지 못한 죄책감과 부인이 알고서 가정불화가 일자 현실도피를 한 것이다. ▲정호경 신부는 두봉 주교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날조해 전파했다.


경찰은 오원춘, 정호경 신부, 정재돈 등 3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9월 4일 첫 공판이 대구지법에서 열렸다. 공판정엔 두봉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150여명, 신도와 일반 방청객 4백여명이 모였다. 전국이 지켜봤다.


검사가 신문했다. ”‘나는 위협받고 있다. 떠들지 말고 기도해달라’는 쪽지를 쓴 동기는 무엇이냐.“ 오원춘이 설명했다. "뚜렷한 동기는 없고 그 당시 잘못된 생각에서 그랬다." 재판정에선 탄식이 터졌다. 오원춘은 이후 납치됐다는 자기 입장을 바꿨다. 오원춘은 ‘허위사실 날조, 유포’를 해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세상은 또 급변했다.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총을 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긴급조치의 당사자가 사라졌고, 긴급조치 또한 효력이 사라졌다. 긴급조치 해제로 오원춘은 석방됐다.


문제는 두봉이었다. 여전한 유신의 잔당들이 남은 정부가 보기에 두봉은 골치가 아팠다. 바티칸에 박동진 외무부장관을 급히 보냈다. 외국인이 국내 정치에 간섭한다고 항의했다. 이참에 두봉을 내보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골치 아프겠다 판단했다.


교황청이 보기에 한국 정부의 항의는 꽤 강력했다. 무리하게 한국 정부와 대립하는 것도 곤란했다. 한국 정부의 추방 압력에 굴복하는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 사임서 수락 여부를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다. 바티칸에선 당시 주교회의 의장인 윤공희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을 불렀다. 김수환 추기경이 분명한 입장을 전했다.


"지금 사임서를 수리하시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두봉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됩니다. 사임서를 반려해 주십시오."


두봉은 남았다. 정부의 우려대로 두봉은 바뀌지 않았다. 1982년 5.18민주항쟁으로 수배중인 박계동과 박관현이 검거됐을 때 두봉이 도와준 게 드러났다. 1980년 5월 18일 박계동은 바로 몸을 피해 안동성당으로 몸을 피한다. 두봉 신부가 있는 곳이었다. 지역 신부들이 적극적으로 박계동의 도피를 도왔다.


박계동은 영덕성당으로 몸을 옮긴다. 다시 영덕성당 정호경 신부의 주선으로 안동시 마라스타수도회관으로 옮긴뒤 밀양 삼랑진 천주교회 송기인 신부를 찾아간다. 송기인 신부는 김해의 나환자 정착촌을 소개한다. 그곳에서 나환자 주택공사 감독일을 하며 몸을 숨긴다. 경찰은 집요했고, 은신처는 오래 머물기엔 위험했다.


박계동은 다시 안동 마라스타수녀회를 찾아간다. 경찰이 냄새를 맡자 영주성당 유강하 신부에게 몸을 부탁한다. 유 신부는 피부과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며 보일러 보조공으로 신분을 숨기고 일하게 만들었다. 해가 바뀌자 대구희망원으로 거처를 옮겨 조정헌 신부 밑에서 희망원 직원으로 일했다.


경찰의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졌고 한국은 이제 너무 위험했다. 밀항 계획이 세워진다. 삼천포성당 김영식 신부가 밀항을 주선한다. 1982년 1월 전남 고흥군 녹동포구에서 밀항을 시도하다 쫓아온 경찰 때문에 실패한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친구 아파트에 숨어지낸다. 신부들은 끝까지 박계동을 보호한다. 1월 20일 구미 천주교회 사제원에 잠시 숨었다 수원 셋방에서 결국 검거된다.


1989년 두봉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인다. 안막동 안동교구청에서 사제단 결의 성명을 발표한다.


"노태우정권이 5공비리와 광주청산문제를 제쳐둔 채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임수경씨 등의 방북을 간첩활동으로 몰아붙이며 '6.29'7.7선언'에 따른 국민들의 통일노력을 탄압하고 있다." "현정권은 국민들의 통일노력에 대한 탄압노력을 중지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 저혼자 살기 위해 지체를 외면하는 평민당의 처신은 더 큰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다."


1980년부터 사임을 원했던 두봉은 1990년 안동교구장직에서 물러난다. 두봉이 타고 다닌 차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브리사 자동차였다. 안동교구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안동과 한국을 떠나지 않은 두봉 신부는 2019년 한국특별국적을 얻으며 제대로 한국인이 됐다. 한국 이름 또한 두봉(杜峰)이었다.

에이아이그림.jpg AI가 그린 그림입니다.


오원춘 사건은 한국 농민운동의 시작이었고, 유신정권을 뒤흔든 거대한 한방이었다. 70-80년대 안동에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유산이 지금 안동엔 가득하다. 한국인 두봉은 2025년 4월 10일 안동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9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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