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전설 : 예천·안동편6 고창전투
“둘째야, 우리 동네가 원래 안동이 아니라 고창이었어.”
“에, 왜 이름을 바꿔?”
“옛날 고려 왕이 이기는데 큰 도움을 줬거든. 그래서 선물로 이름을 준 거야.”
“이름이 선물이야? 나는 다른 선물이 더 좋은데.”
안동은 고려 건국과 함께 지금 이름을 얻었다. 이름을 얻은지 1000년이 넘었다. 그 전 이름은 고창이었다. 전북 고창은 ‘복분자’로 유명하다. 복분자가 한 몸처럼 떠오르는 고창이 안동의 전 이름이었다는 건 참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유는 927년으로 넘어간다.
때는 후삼국 시대. 신라, 고려, 후백제가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혼란한 시기였다. 927년 11월 공산(대구)에서 대충돌이 벌어진다. 후백제군 2만여명과 고려-신라 연합군 1만5천여명이 맞선 큰 전투였다.
927년은 1월부터 고려-신라 연합군이 후백제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후백제 땅인 용주(예천 혹은 문경)을 점령했다. 3월엔 근품성(문경 산양면 일대)를 공격해 함락한다. 4월엔 고려 수군이 경상도 진주 일대를 공격한다. 7월엔 고려군 김락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해 후백제 포위망을 완성한다.
고려-신라 연합군이 주도권을 쥐자 후백제 성주들이 고려해 투항하기 시작했다. 대세를 뒤집기 위해선 큰 한 방이 필요했다. 전술 천재로 불리던 견훤이 머리를 굴린다. 후삼국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신라였다. 고려와 맞서는 대신 신라를 확실히 제압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운다. 신라 심장부는 수도인 서라벌(경주)였다. 이동 경로를 확보해야 했다.
힘을 모아서 근품성(문경)과 고울부(영천)을 점령한다. 후백제군이 점점 신라 중심부와 가까워졌다. 포위망 구축에 전 병력을 내보낸 신라군은 수도에 병사가 거의 없었다.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견훤은 신라쪽으로 고려-신라 연합군 병력이 이동하게 만들어 후백제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든다는 전략이었다.
고려왕 왕건은 신라의 도움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공훤에게 1만 군사를 줘서 신라를 구원하게 한다. 지금부터는 누가 먼저 서라벌에 도착하느냐였다. 많은 군사를 더 빨리 움직이는 자가 승기를 잡는 상황이었다. 견훤은 상주-군위-영천-경주 경로를 따라 서라벌 기습에 성공한다. 최단기 경로였다. 지금 상주영천고속도로가 놓인 길이었다.
후백제 포위망을 만드느라 병력이 없었던 서라벌은 후백제군의 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후백제군은 서라벌을 약탈하고, 신라 경애왕은 목숨을 잃는다.
후백제군이 서라벌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된 왕건은 공훤에게 본인이 합류할 때까지 경주로 가지 말고 대기하라 지시한다. 대야성(합천)에 있던 김락에게는 고려-신라군을 이끌고 대구로 오라 명령한다. 왕건 본인은 5천 기병을 이끌고 남하한다. 세를 불린 뒤 후백제군을 확실히 궤멸시킬 계획이었던 것. 첩보에 따르면 후백제군 병력은 5천 정도. 고려-신라군 병력은 2-3배 정도였다. 병력 차이가 큰데다가 후백제군은 먼저 경주에 이르기 위해 쉬지 않고 이동하느라 지친 상태였다.
퇴각하던 후백제군과 각지에서 합류한 고려-신라군이 마주친 곳은 공산(대구) 일대. 때는 11월이었다. 첫 교전은 후백제군 수색대와 친백제계 승병. 수색대와 승병들은 엄청난 병력의 고려군을 보고 흩어져버린다. 고려-신라연합군은 자신감을 얻는다. 하지만 이들이 놓친 게 있었다.
견훤은 신라 장교 출신들로 신라군의 습성을 잘 알았다. 후백제군이 서라벌을 습격하며 경주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신라군은 본인 가족들이 인질 상태였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했다. 공훤군은 정예군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후백제군이 지쳐있지 않았다.
상대 전력을 오판한 고려-신라연합군에 대해 후백제군은 매복과 기습을 병행하며 혼을 빼놓는다. 상대 전력을 오판한 고려-신라연합군은 잘 싸우는 후백제군을 대하면서 심하게 흔들린다. 교전을 할 때마다 후백제군은 이겼고, 고려-신라군은 무너졌다. 이러한 교전이 이어지자 고려-신라군 기세가 완전히 꺾인다.
고려-신라군 사기가 꺾인걸 안 후백제군은 연합군을 포위하고 결국 연합군은 붕괴됐다. 이제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고려군 주요 장수들 대부분이 전사하고 병사들은 상당수가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에서 고려왕이 잡히거나 죽었다면 후삼국시대 최종 승자는 후백제와 견훤이 됐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왕건은 몸을 숨겼고 그 다음을 기약했다. 고려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견훤의 군사적 천재성이 널리 알려졌다. 더불어 견훤의 잔인성을 만천하에 보여줬다. 신라쪽 호족들과 강원도쪽 호족 상당수가 고려군에 붙었다. 군사면에선 후백제군의 승리였지만 정치면에선 고려군의 승리였다.
이후 대략 3년간 양쪽은 국지전을 이어가며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한다.
929년 견훤이 다시 움직였다. 7월 5천 군사를 이끌고 의성부(의성)을 공격하고 성주 홍술이 전사한다. 곧이어 의성 옆 순주(안동 풍산)를 공격한다. 기세를 몰아 12월부터 고창을 포위한다. 고려에 남은 거의 마지막 경상도 근거지였다.
분위기는 후백제였다. 3년전 공산전투에서 대승으로 후백제군은 사기가 높았다. 신라군은 후백제군에 제압당한 상태. 3년전 고려-신라 연합군 상태에서 고려군 단독으로 후백제군에 맞서야 했다. 그때 입은 군사 체력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고창에 주둔한 고려군은 3천여명. 후백제군과 이에 동조한 신라 호족군에 비해 군세가 많이 모자랐다. 자연스럽게 후백제-신라군이 고려군을 포위한다. 왕건은 즉각 예안진(안동 예안면)으로 병력을 옮긴다.
왕건은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다. 퇴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퇴각로인 죽령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는 의견과 공격에 집중하자는 대장군 유금필의 의견이 맞섰다. 결국 왕건은 유금필의 손을 들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공격해서 저수봉(안동시 와룡면)을 빼앗는다. 이 일대에서 전투가 이어진다. 929년에 시작한 전투는 930년으로 넘어간다. 추운 겨울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후백제군이 불리해진다. 후백제군은 와룡면 석산, 고려군은 병산에 주둔하며 대치한다.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판세를 관망하던 고창의 실력자들이 고려군에 합세한 것. 성주 김선평과 권행, 장길(뒤에 장정필로 개명)이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후백제 우위이던 군사적 판세가 대등해졌다.
저울추는 예민하다. 양측이 균형을 이룰 때는 아주 작은 무게에도 한쪽으로 확 기울어진다. 우리편이라 생각했던 군대가 대거 상대편으로 넘어가는 건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게다가 생각보다 전쟁이 길어졌고, 후백제군은 보급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차고 긴 겨울 또한 불안감을 더했다. 후백제군이 갑자기 무너졌다.
3년 전과 상황이 달라졌다. 후백제군이 무너지며 고려군-고창 호족 연합이 쌓은 포위망에 갇힌 형세가 됐다. 견훤은 겨우 포위망을 뚫었다. 후백제군 전사자는 8000여명. 전멸에 가까운 대패였다. 고려군은 3년전 공산전투의 패배를 완벽하게 만회했다.
이후 2년 동안 후백제군은 군사행동을 전혀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는 3국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이 승리했다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확보한 상태에서 고려군의 숨통을 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 패배로 경북 서부와 경남 동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오히려 충북권 유력 호족인 공직이 배신하면서 충청도가 흔들리고, 전라도 핵심거점인 나주를 유금필이 기습 공격하는 지경에 이른다.
935년 신라가 항복하고,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마침내 후삼국시대는 고려에 의해 통일이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창전투를 잊을 수 없었다.
고창의 유력 호족인 김행, 김선평, 장정필 3명을 3태사라 부르며 고려 공신에 봉한다. 이들은 각각 안동 성씨의 시조가 된다. 안동 권씨(김행), 안동 김씨(김선평), 안동 장씨(장정필)는 바로 이들에게서 비롯된 성씨다. 김행은 야전지휘관으로서 전술적 지휘능력이 뛰어나 '권도를 잘 취하였다'는 뜻으로 특별히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고창 지역에도 큰 선물을 내렸다. 고창 전투 승리로 경상도 동쪽 땅이 평화를 찾았다. '동쪽(東)을 평안(安)하게 했다'는 뜻으로 고창은 '안동'으로 이름이 바뀐다.
안동은 고려 4개 수도인 개경, 서경, 동경, 남경 다음 가는 지위인 대도호부를 하사받는다. 이후 안동은 1897년까지 960년 동안 대도호부 지위를 유지하며 지역 대표 도시로 군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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