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반 이쌍재 선생님
나의 생을 가로질러 돌이켜보면 가장 선명한 기억의 조각들은 10대에 많이 쌓여있다.
애타는 20대도 치열했던 30대도 무거웠던 40대도 방황하는 50대도 아니었다.
어릴 적 변하지 않은 본연의 나였을 그때의 모습이 그리워서일까, 그 시절의 기억들은 쓸쓸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땅끝마을보다 더 먼 바닷가에서 태어난 나는 또래보다 작고 도드라지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을 땅끝보다 더 먼 그곳에 영원히 남겨두던 해, 뱃일을 하던 아버지는 피 끓는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 사고로 다리 한쪽을 못쓰게 되었다.
일곱 살의 어린 자식과 다리 한쪽을 잃어버린 잔인했던 그 해,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그 섬을 떠났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집은 사라졌다.
아버지가 목포에 있는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을 때 나와 언니는 서로 나이가 같은 사촌들이 있는 작은집에 머물게 되었다. 작은집 아이 셋도 적지 않은데 우리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워준 친절했던 작은어머니는 올해 설날 아침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작은집 창문 앞에는 제법 큰 무화과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나는 그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연두색의 설익은 무화과를 비틀어 꺾으면 어김없이 하얀 눈물을 흘리는 떫은 무화과를 씹다 뱉으며 어서 빨리 무화과가 익기를 고대했다.
재래식 부엌에는 큰 가마솥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메주콩을 삶을 때 나는 냄새와 막 쪄낸 콩맛이 고소해 콩 삶는 날에는 가마솥옆에 바짝 붙어 앉아 불멍을 하듯 콩물이 넘치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밤고구마가 아닌 물고구마맛을 처음 알게 해 준 그 가마솥의 마법 같은 순간은 유레카를 외치던 순간에 버금갈 만큼 환상적이었다.
신세를 지며 살았던 나의 두 번째 집에서의 적당히 즐거웠고 적절히 외로웠던 시간을 뒤로하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 1월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바닷가로부터 더욱더 멀어진 서울로 다시 떠나왔다.
서울의 첫인상은 날씨 탓인지 차갑고 낯설었다.
시골에서 전학 온 섬집아이에게 서울의 초등학교는 평평한 바다만 보고 자랐던 내게는 처음 마주한 거대한 산과 같았다. 전학 간 첫날 선생님은 키가 작아 1번을 도맡았던 나를 맨 뒷자리에 앉히셨다. 앞의 칠판도 잘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 뒤통수에 가려 선생님 얼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학기가 끝나가도록 나는 앞자리로 갈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난감했던 것은 한 학기만에 고쳐 질리 없는 나의 날것 그대로인 사투리였다.
요즘말로 나는 내 사투리 때문에 왕따를 당한 셈이었다. 아이들은 내 말을 흉내 내며 따라 했고 깔깔대며 놀려댈 뿐 뒷자리 키 큰 아이들은 키 작은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꺽다리 아이들 사이에서 친구도 없이 1년을 보내고 나는 5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방과 후 활동 미술반에서 이쌍재 선생님을 만났다.
쌍둥이셔서 이름이 그렇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자기소개를 하셨던 미술 선생님은 많은 말씀대신 눈으로 손으로 아이들을 살펴주셨고 각자의 보이지 않는 재능을 스스로 일깨우도록 조용히 응원해 주셨다.
그림이란 걸 물감을 사용해 처음 그려본 나의 졸작을 미술대회에 출품해 난생처음 상이란 걸 받게 해 주셨다.
' 어쩌면 나도 잘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았던 작고 왜소했던 단발머리 어린 소녀가 칭찬을 처음 받아본 선명한 기억 속에는 쌍둥이라는 선생님이 늘 함께 계셨다.
쏜살같이 한 학기가 흐르고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수업을 끝마치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그림이 좋으면 방학 동안 매일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려라"
나는 방학 첫날부터 개학즈음까지 매일 쉬지 않고 그림을 한 장씩 그렸다.
집에서도 그리고 학교 운동당에서도 그리고 소나기가와도 그리고 친구를 꼬셔서 같이 그리기도 하였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순수한 열정을 갖고 무언가에 몰입했던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훗날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언가에 몰두해야 할 중요한 순간들은 많았지만 그것들은 목표를 이루고 대가를 바라는 조건부식 뜨거움일 뿐이었다.
그냥 그리는 게 좋아서인지 난생처음 받아본 칭찬에 목말라서인지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나갈 즈음 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주 작은 한 톨의 볍씨 같은 작은 격려로도 어떤 아이에게는 희망을 품고 꿈을 꾸며 용기를 갖고 무럭무럭 성장하게 한다.
선생님은 기억하지 못할 그 작고 따스한 눈길 덕분에 나는 비록 화가가 되지 못했지만 건축가로서 예술과 미술의 경계로부터 너무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의 외로움과 혼란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서 그림을 만나게 해 주신, 어디선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계실 미술 선생님이 보고 싶다.
덕분에 나의 서투른 그림솜씨가 다름 아닌 엄마의 숨겨져 왔던 재능에서 이어졌음을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함께 그리면서 울고 웃으며 깨닫게 되었다. 키 작은 섬집아이에게 그림을 알게 해 주신 덕분에 비록 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알츠하이머를 겪고 있는 엄마에게 '화가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꽃을 그리고 추억을 그리며 얼마 남지 않은 그 추억의 시간을 차곡차곡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수십 년 전 아주 작은 한 톨의 볍씨가 비로소 싹을 틔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