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중 경기가 가져다주는 선물
저는 어릴 때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1991년도, 제 기억으로 잠실 야구장 어린이 입장권은 500원이었습니다.
당시 11살이던 저는 친구와 둘이 구로디지털단지(당시 구로공단) 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종합운동장에 가서 야구를 보곤 했습니다.
어린아이들 둘이서 야구장을 오니 아저씨들이 많이 좋아해 줬습니다.
당시 쌍방울이란 팀이 처음 출범했는데 팬이 없어서 3루측 관중석이 거의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보통은 1루측에서 OB 베어스를 응원했지만 가끔씩은 3루측에 앉아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1루석, 어떤 날은 3루석. 다른 날은 외야석. 이렇게 여러 곳에서 바라보길 원했거든요.)
자리가 거의 텅 빈 쌍방울 3루석에 앉아서 구경하던 날, 근처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물어봤습니다.
"너넨 왜 쌍방울 응원하니?"
"불쌍하잖아요."
아저씨는 답변이 인상적이었는지 귀여웠는지 저희에게 버터 오징어를 사줬습니다. 돈이 없어 사 먹지는 못하고 냄새만 맡아보다 처음 먹어본 버터 오징어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야구장에 가면 관중석에 입장하기 전 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가면서 푸른 잔디가 눈 앞에 서서히 올라올 때 가슴이 떨려오곤 했습니다. 그때 느끼던 흥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꼭 스포츠 뉴스를 기다려서 봤는데 야구장에서 좀 전에 봤던 장면이 TV로 나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 한 편에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티비에서는 슬로우 장면으로도 나오고 여러 각도로 몇 번이나 다시 보여주니 야구장에서 실제로 봤던 것보다 더 정확하게 플레이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힘들게 멀리 안 가도 되고 TV로 보는 게 좋은 점들도 있구나.
'에이, 그래도 야구장에 직접 가서 보는 게 좋지.'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야구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네요.
스페인에 가서 레알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싸우는 엘 클라시코 경기를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엘 클라시코나 챔피언스리그 주요 경기는 꼭 챙겨 보고 있습니다만, 스페인까지 직접 다녀오는 건 시간과 돈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저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스포츠 경기들은 관중 없이 경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관중 운동 경기만큼은 정말 어색하고 재미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최근에 종료된 챔피언스리그와 지금 진행 중인 프리미어리그, K리그를 기존처럼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처음엔 텅 빈 관중석이 놀랍고 어색했지만 금세 적응한 것 같네요.
경기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어쩌면 무관중 경기가 더 나을 수도 있겠는데?
관중이 없으니 카메라가 관중을 피해서 촬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기에 집중해서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면 됩니다. 선수들이 경기하면서 내지르는 소리들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조차 집중해서 듣게 됩니다.
이런 장면은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카메라 움직임입니다. 마치 게임에서 보던 화면 같습니다. 오늘 손흥민이 4골을 넣은 토트넘 경기에서도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카메라 뷰들이 보여서 신선했습니다.
저는 1년에 두세 번 있는 엘 클라시코를 더 현장감 있게 보고 싶습니다. 8K 드론이 잔뜩 띄워져서 촬영하고 8K VR 장비로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챔피언스리그를 보고 싶습니다.
지금 관중이 없을 때 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많은 깨달음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시대도 언젠가는 끝나겠죠. 더 즐거워질 날들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